농업

(18)배 수출로 연매출 6억원 이주복 씨

바보처럼1 2008. 7. 7. 23:46
[문화일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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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1촌 운동-스타 농민>
‘온난화’ 도 반영하는 혜안 유럽·대만 입맛 사로잡아
(18)배 수출로 연매출 6억원 이주복 씨
김만용기자 mykim@munhwa.com

이주복 ‘우리배’ 사장이 19일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 농장에서 자신이 딴 배를 상자에 담으며 활짝 웃고 있다. 용인 = 김만용기자
‘88서울올림픽’의 추억을 뒤로하고 서울 곳곳이 개발로 들썩이던 1989년 그는 아내와 함께 서울을 떠났다. 서울 이태원에 살면서 퇴계로엔 어엿한 개인 사업체가 있었지만 “시골로 가자”며 매달리던 서울 토박이 아내의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 아내는 서른하나. 도시가 주는 쾌락에 한껏 빠져있을 나이에 그들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 마을에 터를 잡고 땅을 일궈나갔다. ‘우리배’라는 브랜드의 배를 수출해 6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이주복(53)씨의 귀농 성공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서울 사람이면 누구나 나이들어 시골로 내려가 낭만적으로 사는 꿈을 꾸잖아요. 저야 초등학교때까지 시골에서 살았다곤 하지만, 마누라는 서울 토박이거든요. 그런데 마누라가 결혼하자마자 시골로 가서 나물 캐먹고, 과일 따먹으며 살자고 못살게 굽디다.”

처음부터 배를 기르진 않았다. 귀농 자금 2억원으로 먼저 집을 짓고, 논밭을 사서 대추나무 500그루를 심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대추나무가 대부분 죽어버린 것. 대추나무는 배수가 잘돼야 하는데, 그 지역 토질이 배수가 잘 되지 않는 황토흙이었던 사실을 도시 출신 부부가 알 턱이 없었다. 그때부터 부부는 시골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공부를 했다. 욕심쟁이 아내는 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입학까지 했다. 고심끝에 고른 게 황토질에 적합한 배나무였다. 당시만 해도 배는 전남 나주처럼 따뜻하면서도 사계절 구분이 뚜렷한 남쪽에서 자라야 당도가 높다고 생각했지만 부부는 멀리 내다봤다. 온난화 현상이 심해질수록 배의 산지는 점점 북상할 것이라는 판단이 딱 들어맞은 셈이다.

“배농사로 돈을 벌게 된 건 기른지 한참 지나서였어요. 2001년에 경기도와 농협무역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역 농산물 수출을 도왔는데, 우리 용인배가 유럽과 대만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거죠. 국내에서야 용인배를 어디 알아주기나 합니까? 그런데 외국 바이어들 사이에선 용인배가 유명해요. 달고 모양도 좋다고.”

이씨는 ‘우리배’가 단 이유를 게르마늄 농법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열매가 맺힐 때와 중간쯤 자랐을 때 뿌리와 잎에 게르마늄 희석액을 뿌려주면 응애 같은 곰팡이를 없애고 당도와 색을 좋게 해준단다. ‘우리배’의 전 직원이라곤 공동 사장격인 자신과 아내, 회사의 중역(?)인 처남 셋뿐이다. 이들 세 사람이 약 5만㎡(1만5000평)의 배밭에서 한해 수확하는 양은 300t(1만5000상자 분량)으로, 매출액 6억원에 순이익이 1억원 넘게 남는다. 돈도 돈이지만, 사실 부부는 시골에 와서 대성공했다. 서울서 툭하면 아프던 아내가 잔병이 싹 나았다. 그리고 시골 생활 7년만에 생각지도 않던 늦둥이 딸이 생겼다.

“저는 아내 말을 잘 들어서 운좋게 성공했을 뿐이에요. 시골생활 만만히 보면 안됩니다. 귀농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아요. 그리고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해야만 외국 농산물에 맞설 수 있어요.” 인터뷰 내내 겸손하던 이씨의 얼굴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풍요로워 보였다. 031-339-2140

용인 = 김만용기자 mykim@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7-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