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눈들이 그렇게 맑아지는 계절,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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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우리의 눈들이 맑아질 뿐만 아니라 그 무궁한 푸른 하늘은 우리의 눈동자로부터 모든 피로를 빨아들여 줍니다. 현대 인간의 근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피로 그것입니다. 위기나 원망은 때로는 지나친 표현이 되기 쉽고 이상과 원망에 도달치 못하는 모든 부면에서 현대의 인간들은 희망 속에서도 분명히 피로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피로가 가장 잘 반영되는 곳이 눈동자인가 봅니다. 그런데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한없이 우아한 푸른빛이 우리의 시선을 튕기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빨아들여 거기에 묻혀 있는 피로까지도 분산 해체시켜 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의 중심은 도회에 있으며 아스팔트나 가로수 같은 사물은 도회의 상징으로 쓰일 수 있으므로 이러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얻을 수 있겠지요.
- 금남로의 플라타너스 위로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의 피로를 그렇게도 무한히 빨아들이는 하늘입니다.
탄식은 슬픈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탄식은 오히려 아름다운 곳에 더 많이 깃들입니다. 말라르메는 <목신(牧神)의 오후>에서 “무르익은 투명한 포도알을 공중에 비취고 목신은 그 아름다운 빛깔에 취하여 자기의 탄식을 포도송이 송이에 불어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가을의 아름다운 현상이 조락(凋落)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탄식의 의의는 더욱 진실하여질 것입니다. 구가나 찬미는 가을에 쓰일 어휘로서 시신(詩神)이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창조의 신이 아름다운 육체에 생명을 불어 넣듯 유종(有終)의 인간이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육체에 위대한 탄식을 불어넣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 구절을 나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먼 곳에서 익는 석류와 투명한 포도알들에 당신과 나의 탄식을 불어 넣으려면, 아직도 주말의 사흘을 더 기다려야 하는 지금은 그렇게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시간이 영구히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처럼 아름다운 시간을 상실하고 살아가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 다시 말하면 가을의 청명한 눈동자를 반드시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을 영원에 통하게 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별만이 오직 순간을 영원에 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별은 공간적으로는 허한 듯하나, 시간적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보들레르는 어느 길가의 군중들 틈에서 잠깐 바라보고 그대로 지나쳐 버린 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기억하여 “광명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은 영겁의 후일일까”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별만이 영겁의 후일에까지 우리의 심정을 흐르게 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아름다운 이 시간은 이별을 통하여 영겁의 후일에 닿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일수록 그 이별의 슬픔은 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슬픈 것일수록 그 아름다움은 더할 수 있으리라는 역설도 성립됩니다. 보왈로는 그의 정책의 결론을 “진은 곧 미, 미는 곧 진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시의 결론은
- 가장 슬픈 것은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서술을 시상(詩想)의 내용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구상하여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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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눈동자
눈들이 그렇게 맑은 가을입니다.
금남로의
플라타너스 위로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의 피로를 그렇게도
무한히 빨아들이는 하늘입니다.
먼 곳에서 무르익는
석류와 투명한 포도알들에
당신과 나의 탄식을 불어 넣으려면,
아직도 주말의 사흘을 더 기다려야 하는
지금은 그렇게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 시간의 마지막은
언제나 이별을 지나,
영겁의 후일에 닿아야 합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글_ 김현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