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야

인생의 3대 악재,영원한 이이콘 안철수

바보처럼1 2011. 9. 6. 04:42

 

김대섭 작품展

대한민국 미술대전 (평론가상) | 대한민국 수채화대전 (대상)
단원미술대전 (우수상, 특선) | 대구미술대전 (우수상)

 

Memory (매실)_45.5×37.9cm_Oil on canvas_2011

 

   

Memory (포도)_100.0×30.0cm_Oil on canvas_2011

 Memory (청포도)_91.0×45.5cm_Oil on canva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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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_53×33cm_ 78×39 Oil on canvas_2011

 

 

Memory_72.7×65.2cm_Oil on canvas_2011

 

 

Memory_90.9×72.7cm_Oil on canvas_2011

 

 

Memory_90.9×60.6cm_Oil on canvas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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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_80.0×25.0cm_Oil on canvas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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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_162.0×53.1cm_Oil on canvas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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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_50.0×35.0cm_Oil on canvas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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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_78.0×39.0cm_Oil on canvas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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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3대 악재


독일인들은 장수의 3대 비결로
좋은 아내와 훌륭한 주치의 그리고
젊은이와의 대화를 꼽는다고 한다.

좋은 아내는 원만한 성생활과 인생을 보장하고
훌륭한 주치의는 건강을 담보하며
젊은이와의 대화는 삶에 대한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

젊어 돈을 많이 벌었거나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 중에는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이가 의외로 많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좋았던 시절만을 기억할 뿐
그 후의 고독한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젊어서 잘 나가던 사람보다는
나이들어 존경받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인생에는 3대 악재가 있다고 한다.

 

▣ 첫째, 초년의 출세다

젊어서 출세한 사람은
종종 독선과 아집에 빠지거나 교만해지기 쉽다.
또 여생 내내 과거만을 추억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24세에 올림픽 최고 기록으로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했던
고 손기정 선생은 그 후 60여년 동안 금메달의 영광과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는 회한에서 벗어나기 힘드셨을듯 싶다

30대 초반에 "황태자" 또는 소통령 소리를  들어가며
대단한 위세를 부렸던 전직 대통령 아들의 행로는
그 후 결코 순탄치 못했다 

50대 중반쯤  인생의 정점에 서고
60대에는 관록으로 대접을 받으며
이후 원로로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일 것이다.


▣ 둘째, 중년의 상처다

40~50대에 배우자를 잃게 되는 경우로서
배우자와 갈라 서거나 60대 이후 사별하는 것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자식들이 미처 성장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아이들 교육과 결혼은 물론 자신의 삶마저 엉망이 돼 버린다.

이런 봉변을 하지 않으려면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 돼야 한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거나 희생하지 말고
부부 위주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이 좋다.

남편이 아내를 존중해 주고
아내가 남편을 가정의 중심으로 대접해 줄 때
부부가 해로 할 수 있고 아이들도 비로소 부모를 섬기게 된다.


▣ 셋째, 노년의 빈곤이다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지만 재산이 없는 경우다.
젊어서 고생과 가난은 인생의 자양분이 될 수도 있으나
노년의 빈곤은 노추를 가져올 뿐이다. 불행한 일이다.

노년빈곤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해야 한다.
골프와 같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보다는
등산, 영화감상, 미술관 순례와 같이
돈 적게 들고 자주 할 수 있는 건전한 취미를 가져야 한다.

또한 노년에 허심탄회하게 어울릴 수 있는
오래 되고 맛깔스러운 간장 같은 친구도 필수다.
지위와 비즈니스로 만난 친구는
은퇴와 동시에 멀어지기 마련이다.

<발췌/가필/재편집> 


 


 

 

 

종교가 무엇이길래...메카로 몰려드는 인간 홍수
노르웨이 연쇄 폭탄·총기난사 사건을 저지른 테러범 브레이빅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 모슬렘으로부터 서유럽을 구하고 싶었다며 무죄를 주장하는 무서운
현실을 보며 문화와 종교에 대해 새삼 머리 아프게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 편집자 주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 이슬람 교의 성지 )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무슬림 ( 이슬람 교 신자 ) 는
일생에 한 번 이상 메카로 순례할 것이 의무로 되어있다.

 

파일:Mecca, Saudi Arabia locator map.png

 

(하즈 아랍어)는 메카의 순례를 마친 자를 '하지'라고 부르며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다.

 

무슬림 (이슬람 교 신자 ) 이외의 사람은 메카 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비무슬림 ( 신자 아닌 사람 ) 으로서
메카 내의 의식을 본 사람은 극히 적다.

 

13억이 넘는 전세계의 무슬림들이 매일 5번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 예배를 드린다. 이 기도의 방향을 '기블라(qiblah)'라고 한다.
카바 신전이 있는 아라비아 반도 의 메카 에는 매년 약 200 만 ~ 300 만 명의 순례자가 모여든다. 순례자들은 메카의 중심인 카바
신전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일곱 번 도는 의식을 치르며, 가능하다면 신전의 성묘에 입을 맞추거나 손으로 만지곤 한다.

 

속계(俗界) 에서 입는 옷을  벗어 버리고 무늬 없는 순례복 을 입는다. 수렵, 손발톱을 자르는 일, 향수를 바르는 일,
모자를 쓰는 것,  성교 따위는 금지되고 이와 같은 터부 상태는 순례 의식이 모두 끝날 때 까지 지킨다.

 

 

성지 에서도 핵심은 카바 신전, 직육면체 모양 신전 높이는 약 15m 카바(알라의 집)는 15 미터 높이의 카바 위에는 검은 헝겁이
덮혀 있으며 그 위에는 코란의 경구들이 금로 수놓여 있다. 카바 주위를 7번 도는 행위를 예배 의식 중 하나로 한다. 동쪽 구석,
지면에서 1.5m 정도 높은 곳에 흑석(黑石)이 끼워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브라힘(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일이 알라의
명을 받들어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흑석이 있는 모서리의 반대쪽에 잠잠 이라고 하는 성천(聖泉 성스러운 샘)이 있다.

 

카바에서 '검은 돌'을 만지는 행사, 미나에서 '사탄' 모양을 한 비석에 돌을 던지는 행사

 

 

신전에는 검은 돌이 있다. 이것은 석신으로서의 알라를 상징하고 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카바 신전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노아 홍수 이후 알라는 아브라함을 부르게 되는데, 알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도록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은
알라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알라는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스마엘을 다시 살렸다.
그 후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그 검은 돌이 있는 자리에 신전을 건립했는데 바로 카바 신전이라는 것이다.

 

 

 

 

순례자는 카바를 7 번 도는 사이(Sai')를 행한다. 이후 잠잠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하즈가 진행되는 동안 순례자들은 미나라는
작은 마을로 향해 돌기둥으로 상징화된 악마(사탄)를 돌로 쫓는 의식을 행한 뒤, 무함마드 가 최후의 설교를 한 아라파의 언덕으로
올라가 예배를 드린다.

 

 

파일:Kaaba mirror edit jj.jpg

위키피디아 로 몰려드는 인간의 홍수. 누구인가 용케 촬영 했다. 촬영 금지는 물론 관광 Visa 비자를 안 해주는 나라.
돌 맞아 죽지 않은 것이 다행.

 

 

 

노르웨이는 장미 물결 25일(현지)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사 앞에서 시민들이 장미꽃을 들고
지난 금요일 폭탄 테러와 총기 난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미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빅은 자신의 소행을 인정하면서도
이는 무슬림 이민자들로부터 유럽을 구하려 했던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노르웨이 경찰은 이번 사건의 사망자 수를 애초 86명에서 68명으로 수정 발표했다. 
오슬로(노르웨이)=AP/뉴시스 2011-07-26  

 

 



우리가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단 하나

세계적인 철학자 나풀레옹 힐은
버지니아주 남서쪽 산지 마을의
한 칸짜리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얼마나 외딴 곳에 살았던지
열두 살 때 처음 기차를 보았을 정도다.
게다가 그는 여덟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나풀레옹 힐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새 어머니를 데려온 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친척들 한 분 한 분과
새어머니를 인사시켰다.
내 순서가 되자, 최대한 심술궂게 보이려고
잔득 찡그린 얼굴로 팔짱을 꽉 끼었다.
아버지는 나를 이렇게 소개하셨다.

'이 애가 내 아들 나풀레옹이오.
우리 마을 최고의 악동이지.
지금도 무슨 일을 벌일까 궁리하는 중일 거야.'

그러자 어른들이 모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새어머니는 가만히 내 앞에 다가와
조용히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잘못 보셨어요 당신,
나풀레옹은 마을 최고의 악동이 아니라,
아직 자기 지혜를 제대로 발휘할 줄 모르는
영리한 소년이란 말이에요."

 새어머니가 북돋워 준 힘에 용기를 얻어
나풀레옹은 갖고 있던 총을 팔아 타자기를 샀다.
새어머니한테 타자를 배우면서,
자기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나풀레옹이 남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이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마음 가짐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나는 악동이다'라는 믿음을
'나는 똑똑하고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고로 바꾸었고,
그 결과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세계 여러나라의 왕과 대통령의 자문 역할을 했으며,
성공학 관련 저서를 통해서 수백만 독자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의 책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긍정적인 사고는 긍정적인 결과를 맺고,
부정적인 사고는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우리가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 뿐이다.

<존 템풀턴의 저서중에서/발췌/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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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irplane That Flies like A Bird (새처럼 나는 비행기)

SmartBird - a lightweight airplane modeled on a seagull - flies by flapping its wings.

 

 신체 예술-남성

 


자우림/야상곡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화장실 벽에 낙서 금지라고 써있는 것은 낙서일까, 아닐까?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은 유일한 가축은 '고양이'인데
왜 기독교인들은 고양이를 키울까?

물고기의 아이큐는 0.7이라는데,
그런 물고기를 놓치는 낚시꾼들은 아이큐가 얼마일까?

우리 마누라는 온갖 정성을 들여 눈 화장을 하더니,
갑자기 선그라스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보로사의 초대 회장이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걸 알면서도
왜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까?

짐승 만도 못한 놈과 짐승 보다 더한 놈 중
도대체 어느 놈이 더 나쁠까?

하루밖에 못 산다는 하루살이들은
도대체 밤이 되면 잠을 잘까, 죽을까?

피임약 광고 모델은 처녀일까, 유부녀일까?

70대 재벌 남편과 사별한 30대 미망인은 슬플까, 기쁠까?

고래나 상어들도 참치를 먹는다는데,
도대체 그 녀석들은 어떻게 통조림을 따는 것일까?

   

전학 온 아이

새로 전학 온 철수에게
선생님이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

"철수야, 2 더하기 2는 얼마지?"

선생님 말에 철수는 책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선생님, 저 집에 갈래요!"

"아니 왜! 너무 쉬워서?"

"아뇨! 선생님께 전 배우로 왔는데
 선생님께서 제게 물으시니까요."

밤 12시 기준으로 집안 내력

잘되는 집안 → "내일을 위해 잘 시간이다"

안되는 집안 → "이 녀석, 몇신데 아직도 안들어 오는거야?"

막가는 집안 → "아부지는 또 늦네?"

콩가루 집안 → "이놈의 마누라 들어오기만 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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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jpg

 







 

*    *    *

 

 

비밀 / 누구나 마음속 숨기고 싶은 비밀은 있는 법.
감추고도 싶고 분출하고도 싶은 비밀스런 열정과 욕망을
붉게 익은 사과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 김현展(인더박스갤러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나쁜 일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발췌-

 

To afford cup of coffee at ease!
Scrapped in places, Edited or Written Partially
by 00000, Sincerely, Private, 7.30, 2011 
 
     

< Hohoya Plus >

 

남자 때문에 혹독한 대가(代價) 치르는 여자

이 세상에는, 소위 질(
) 나쁜 남자를 만나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여자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그렇다! 그 누가 보아도, 아주 쉽게, (
) 나쁜 남자임을 알 수 있는 그런 ‘뻔한 남자’ 에게 빠져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고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여자일수록 그러한 일이 단 한번만으로 그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되풀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여자들에겐 남자와의 만남이 늘 그런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런 여자의 마음을 끄는 것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일반 남자들의 평범함 보다는... (
) 나쁜 남자들이 지니고 있는 그 ‘이상한 특징이나 징조들’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다! (
) 나쁘고, 비딱한 남자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비정상적인 기류 ’가, 그런 여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특별한 매력’으로 보여지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정상적인 것을 감싸주고, 고쳐주고 싶은 충동이 그 여자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잊지 말고 기억해 두시라! 그러한 비정상적이고
나쁜 남자들의 본성은 고쳐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고쳐 질 수가 없는 것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다!

하긴, 그러한 결점들을 얼마 동안은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고쳐 질 수가 없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대가가 너무나 혹독해 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 헤어지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러야만 된다는 점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숭고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이 ‘만병통치약(Panacea)’은 아니다! 이 점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더욱 더, 비참한 것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괴로워 해야 하는 편은 여자인데도... 모든 권한- 생사여탈지권(
生死與奪之權)과도 같은 권한-은 언제나 남자가 움켜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런 남자일수록 여자를 철저하게 감시하면서, 자기의 손아귀 속에 가두어 두려고만 하고 있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사랑과 관심’이라고 포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남자와 살아야 되는 여자는, 단 한 순간도, 그 남자의 억세고 매서운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는 관계로, 한평생 동안을 철저한 노예의 신세로 살아가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직접, 그런 여자들을 몇 명 상담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런 여자들일수록, 나쁜 남자를 옹호하기에 급급 하였고, 남자의 횡포와 무자비한 폭력은 호소 하면서도, 그 남자를 처벌하거나 비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렇게 살아 가도록’ 태어난 여자들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그러한 남편을 ‘그 새끼’, ‘걔(그 애)’라고 호칭을 하면서도, 이혼 만큼은 결코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냥 그대로 그렇게 살고 있는 여자도 보았다.

어떤 여자는, 이제 나이가 60대의 후반에 들어가 있는 여자였는데... 한 평생 동안을 그러한 남편 밑에서 얻어 맞고서 살아왔으면서도, 그리고 그 남편이 이제는 죽어서 없는데도... 여전히, 그러한 비굴한 행동을 그대로 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지... 그런 여자들은 그러한 나쁜 남자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비록, 또 다른 기회가 있게 되더라도... 대개는, 또다시, 그런 류()의 남자에게 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 그러한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다, 가지고 있겠지만... 아마도, 그런 여자들에게는 ‘평범한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 평범한 점- , 일반적이고 평범해서 좋은 점-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나 아닐까?

그 반면에, 그 질(
) 나쁘고, 비딱한 남자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그러한 비정상적인 ‘이상한 기류’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나 아닐까? 쉽게 말해서... 그러한 여자들의 내부에는 ‘평범한 남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그런 내면성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소리’ 라는 것이, 혹시,
나쁜 남자를 ‘저 사람은 나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불쌍한 사람!’ ‘저 사람을 나의 숭고한 사랑으로 감싸서 보호하여 주어야만 되겠다!’ 라는, 일종의 ‘망상’이나 아닐까나? 바로, 그러한 자기만의 망상을, 본인 스스로는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왜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할까? 에서 /이상봉 著 / 재편집 / 이미지 추가>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P.O. Box 52063, Philadelphia, PA. 19115



영원한 아이콘 안철수,
‘오늘’에 열중하며 마이웨이를 가는 ‘쿨한 베짱이 ’

"비오는 날이면 집앞 우동가게 가서 우동 한 그릇 먹고, 대형마트에 장보러 가서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우유 하나 덤으로 사는 재미로 살죠. 호텔에서 비싼 음식 먹거나 밤에 조용한 데 가서 술먹는 일은 거의 없으니 묶어서 싸게 파는 1+1 상품 쇼핑하는 걸 즐겨요. 다만 얼굴이 알려져서 사람 많은 데 가면 조금 불편한 뿐입니다. 하하하"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49). 그는 지난 23년 간 매스컴을 오르내리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의사, CEO, 교수 등 남들은 일생에 한 번 이루기 힘든 직함을 반세기 동안 모두 달았다.

게다가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도 한둘이 아니다. 청소년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영입하고 싶은 CEO, 가장 건전한 경영자, 차세대 경제부문 리더, 떠오르는 스타교수 등등.

이처럼 다양한 직함과 타이틀에서 보듯, 안 원장은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왔다. 그래서 일까. 늘 대중의 이목을 신경쓰고, 또 가끔은 무거운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 했다. 하지만 대답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매스컴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신경 쓰면서 꾸미고 살았다면 23년간 관계했던 매스컴을 견뎌내지 못했겠죠. 사람들이 굴곡 없는 삶이다 그러는데, 꾸미지 않고 진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름 일관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선한 인상에 겸손한 말투였지만 눈빛에는 '분명함'이 담겨 있었다. 주변 시선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쿨함'도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안 원장이 한 마디 던졌다. "참, 눈치 볼 때가 있기는 있네요. 대형마트에 장보러 갈 때요. 1+1상품은 인터넷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요. 하하하"


도전? 목표? 계획? 나와는 거리가 먼 말들= "제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아등바등 노력했던 기억은 전혀 없어요. 다만 하루 주어진 24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 열정 갖고 할 수 있는 일 열심히 하면서 살았던 기억만 있네요."

뜻밖이었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인생을 설계해 온 모범생 이미지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의사, CEO, 교수 모두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지 않고는 이루기 힘든 직업인데 안 원장에겐 이 두 가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원장은 밖에서는 자신이 도전하는 사람으로 비춰지지만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도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타입도 아니다. 오히려 목표 자체를 정하지 않는다. "뭔가를 이루려고 계획하기 보다는 매순간 열심히 살다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들이 성큼 다가왔다고 할까요. 현재를 열심히 즐기다 보니 미래가 오던 걸요."

하지만 안 원장의 인생이 처음부터 물 흘러가듯 순조롭지는 못했다. 착실히 의학도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창업의 길로 들어선 것도 자신이 더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선택이었지만 이 역시 목표한 바는 아니었다. 안 원장은 "미래 전망은 아예 보지도 않고 무작정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 창업 당시 역시 컴퓨터 바이러스야 말로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재미 있게 열정 갖고 계속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혹했다. 창업 초기인 1995~1999년은 안 원장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그에게 가장 큰 일은 매달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다. 매달 초가 되면 행여 월급을 못 줄까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매출이 변변치 않은 달에는 돈을 구하러 은행을 돌며 어음깡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어음깡이라는 게 기업에 따라 객관적 평가가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담당 직원 마음대로 고무줄 평가를 받더라고요. 누구한테 잘보이려는 건 정말 곤욕이었죠."

하지만 안 원장을 더욱 괴롭히는 건 본인 스스로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사업한 지 3년이 지난 1998년 사무실은 남부터미널 부근에 있었는데, 안 원장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도 매일 밤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그날 번 돈과 쓴 돈 등 10원짜리 하나하나 세면서 하루를 보냈다. 순간 울컥했다.

"여기서 내가 뭐하고 있는 지 서글퍼지더라고요. 동기동창들은 의사나 교수하면서 잘 살고 있는데... 나는 그때 배운 거 다 버리고 그러고 있었으니…"


바닥에서 정립한 마이웨이 철학 '절대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안 원장은 평생 자신을 바로 세워줄 버팀목 같은 철학을 만들었다. 바로 "절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할수록 제 자신만 힘들어지더라고요. 남들이 다 위만 보고 갈 때 나라도 가끔 아래를 내려다보자고 생각했죠."

안 원장은 이를 산을 오르는 것에 비교했다. "정상만 바라보면 구름이 가리기도 해서 불안해 지는데, 뒤돌아보면 없는 가운데 이 만큼 왔구나 하고 안심이 되잖아요. 결국 원대한 목표가 사람을 지치게 하더라고요."

이런 생각에 안 원장은 목표를 크게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 허덕이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일주일, 한달이란 시간을 값지게 쓰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남부터미널 작은 사무실 안에 갇혀 장부 계산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는 자신을 애타게 여기던 그 자신을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안 원장은 걷기를 통해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너무 안 풀리면 정처 없이 걸어다녔어요. 서초동 소나무사거리에서 출발해 테헤란로 지나 삼성역까지 걸으면 2시간 반이 걸리죠. 모르고 지갑 두고 나간 날은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해서 왕복 5시간 가까이 걸었던 기억이 있네요."

흔히 걷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정신수양이는 말이 있다. 안 원장은 강남 도심 일대를 5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마이웨이 철학을 정립했다.

안 원장의 마이웨이는 훗날 안철수연구소가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처음 백신을 개발하면 신제품 값을 받는 대신 새로운 버전에 대해 유지, 보수 비용을 받기로 했다. 백신 특성 상 신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처음 도입된 계약방식을 거부했다. 연구소 영업담당 임원도 실적이 안 나오자 안 원장에게 포기하자고 청했다.

"당시 유혹도 매우 컸어요. 수익이 안 나왔으니.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기로 했죠. 마침내 법률까지 바뀔 정도로 지금은 그 계약방식이 상식이 됐죠. 눈앞의 돈만 좇다 단기 계약에 의존했으면 지금의 500억 매출은 꿈도 못 꿨을 겁니다."

안 원장의 이런 철학은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안 원장의 딸은 미국에서 수학과 화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원해서 시작한 길이다. 딸에게 진로에 대해 아버지로서 훈수를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본인 인생인데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죠. 내가 하도 이래라 저래라 말이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딸이 나한테 물어볼 정도 입니다."

또 마이웨이 철학은 23년간 매스컴에서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잘 나가는 사람들 보면 외부평가가 진짜 자기 실력인 줄 아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자기 본 실력 알고 나면 많이 괴로워 하죠. 외부평가는 롤러코스터 같아요. 몇 번 올라가는가 싶더니 바로 고꾸라지기 일쑤죠. 그래서 저는 외부평가 연연하지 않고, 평가가 아무리 나빠도 내 본 실력만 믿고 살아 왔습니다."


워커홀릭? 나는 휴먼홀릭! = 안 원장은 아직 여름 휴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들 다 1년 중 한 번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국내외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올해 역시 서울대로 둥지를 새로 틀었기 때문에 여름휴가 떠날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평생 일과 공부에 묻혀 살았다.

"연구소 차리고 나서는 정신 없이 일만 했어요. 교수되고 나서는 방학이 있었지만 초보 교수가 어디 놀러갈 수 있나요. 학회 등 공무 상으로 해외에 가본 적은 있지만 LA, 런던, 파리 등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는 아직 못가봤네요."

이쯤 되면 워커홀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짧은 순간 조차도 현실을 떠나 머리를 식히기 보다는 철저히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안 원장이 진정으로 열중했던 것은 결국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의대생 시절 우연히 들어간 카톨릭학생회를 통해 진료봉사를 하면서 책에서만 읽었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한계를 느꼈던 시절이었지만, 안 원장은 사람들을 만나며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더 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안 원장이 연구소를 차리고 회사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초기엔 힘들었지만 10년 정도 지나니까 안 연구소는 벤처기업 중에서도 매우 큰 기업이 됐죠. 하지만 안 연구소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주변 벤처기업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청년 일자리는 점점 줄고, 도전의식도 약해졌죠."

"사람들이 그런 문제의식 왜 갖고 사냐고 하지만, 혼자서만 잘 살수는 없으니까요. 우리집 아이라 행복하려면 옆집 아이가 행복해야 하니까요."

결국 안 원장은 CEO 혼자 힘만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느꼈고, 보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학계의 길을 택했다. 2008년 미국 와튼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은 뒤 KAIST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안 원장에게 교수라는 직업은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교육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일을 한다는 데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교수는 아직까지 정책 당국자들이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집단입니다. 여러 조언들을 해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20대를 대상으로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거나, 카이스트에서 6학기 동안 학생들 가르치면서 실제 사람들 생각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어요. 사장 했었으면 못 느꼈을 것들이죠."

최근 흘러나오는 정치권 영입설에 대해서도 안 원장은 교수가 매우 중요한 위치라며 에둘러 부인했다. "정치라는 게 혼자서는 결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나와 같은 생각 갖고 있는 사람 만나는 거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교수는 작은 부분이지만 혼자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같은 생각의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안 원장이 신념과 가치관이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 김미경 교수(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다.

"카톨릭학생회 봉사활동 가서 만났는데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랑 같았어요. 또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무조건 시키자는 교육관도 같았어요. 특히 돈 더 많이 벌고, 더 안정적인 거 따지기 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 투자하는 직업관도 똑같았죠."


약속된 미래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나의 최대 자산은 '사람'=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안 원장의 라이프스타일은 '내일보다는 오늘을 위해 살자'였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그는 일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는 개미가 아니라 하루를 최대한 보람 있게 보내는 베짱이에 가까웠다.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지난 삶의 행보에 그대로 뭍어 있다. 엘리트 코스인 의사를 훌쩍 그만두고 야심차게 차린 회사를 차렸지만 자기발로 CEO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의대를 들어갈 때, 창업할 때 모두 안 원장 스스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학 후 카이스트 교수로 임명됐을 때 임용장에는 2008~202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65세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다시 3년 만에 안정된 자리를 뒤로 하고 서울대로 옮겨 왔다. 서울대 역시 그에게 2027년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안 원장은 2027년까지 서울대에서 교수를 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장기 계획이란 걸 세워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내 평생 한번도 안정, 보장이란 말이 나를 붙잡은 적은 없어요. 선택의 순간에서 모든 걸 고려했지만 이 둘은 항상 빠져 있었죠. 처음엔 의사만 할줄 알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결국 안 원장은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시간까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시간마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투자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렸던 셈이다.

다만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명확한 한 가지 기준은 있었다. "결정은 혼자 오래 고민해서 내리는 편입니다. 대신 기준은 늘 같았어요. 나에게 더 의미 있고, 내가 계속 열정 갖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에는 늘 사람이 제일 위에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 역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달라니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나왔다.

"낳아주신 부모님은 물론 전기생리학 전공 시 존경했던 교수들은 모두 노벨의학상을 받았어요. 90년 중반 전설적인 프로그래머들에 열광했고, 회사를 차리고 나선 앤디 그로브(인텔 창업자)처럼 성공한 엔지니어 출신 CEO가 되고 싶었죠. 와튼스쿨 다닐 때 레오나드 M. 로디시 교수로 부터 배운 교수법 덕분에 카이스트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잡았어요."

안 원장은 직업이 바뀔 때마다 롤 모델도 매번 바뀐다고 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알찬 지식을 배웠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요즘처럼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게 중요할 때가 없어요. 20~30대는 혼자 실력으로도 일하지만 40대부터는 인간관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죠. 나이 들어서 친구 사귀기 힘들다고 하는데 다 옛말 같습니다"

그는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친화력보다 더 큰 무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친화력은 처음에 쉽게 하는 데만 도움이 되지 진정한 관계 유지하는 것은 가치관 등 동질감을 형성하는 거 같아요. 안 연구소 16년 됐는데 지금도 장기근속자는 50명이 넘어요. 친구로 따지면 평생 친구인 거죠." <헤럴드경제 정태일 기자 2011.07.28 / 조합/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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