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글

[스크랩] 세종대왕릉에서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바보처럼1 2006. 4. 22. 23:12

 

영릉(英陵)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는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 씨(沈氏)의 능으로, 구역 내에 조금 떨어져 있는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어 세종대왕 유적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주차장은 매우 크고 잘 정비되어 있으며 주차비도 무료입니다.

 

조선의 27명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대왕이란 칭호로 불리는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아마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당시 세종의 아버지였던 태종은 형제들까지 포함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통해 왕이 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왕이 된 후 형제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기 처지에 대해 괴로워하였으며 그런 비극은 자기 대에서 끝나기를 바래왔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권력투쟁의 논리적 합리화였던 장자승계 원칙을 누구보다도 지키고자 노력 했었습니다.

 

비록 세자인 양녕대군이 패륜과 방종을 일삼았다고 하더라도 세자의 지위를 폐할 정도의 결정적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문 보다는 무에 치중했던 자신과는 달리 국초의 기틀을 제대로 잡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기질을 더 닮은 양녕보다 총명하고 독서광이며 형제의 우애를 무척 중요시했던 충녕(세종의 대군시절 이름)이 더 적합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태종 18년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 폐위와 충녕의 세자 책봉을 감행합니다. 태종으로서는 신하들의 무수한 반발과 자신의 비극이 되풀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쓴 정치적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이 날이 조선 500년의 명운을 가른 최대 사건의 날이라 생각합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면 정면에 능으로 들어서는 훈민문이 있고 오른쪽에는 제실이 왼쪽으로는 세종기념관이 있습니다. 보통 왕릉에 가보면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 길을 따라 걸으면 바로 능이 나오는데 이처럼 또 다시 문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우리에게 세종대왕의 위상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간혹 지인들과 대화 중에 ‘세종대왕은 조선에서 어떤 사람이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답변을 할 테니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한 후 질문을 던지는데 맨 처음 ‘세종대왕은 조선의 왕 중의 하나이다.’ 맞니? 라고 물어보면 ‘맞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후 계속 질문을 던지는데 ‘세종은 조선의 왕 중에 뛰어난 왕 중의 하나이다’ 맞니?  ‘세종은 조선의 왕 중에 가장 뛰어난 왕이다’ 맞니? 라고 질문하면 계속 ‘맞다’ 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마지막 답변을 들은 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 답은 70점, 두 번째 대답은 80점, 세 번째 답인 ‘세종은 조선의 왕 중에 가장 뛰어난 왕이다’ 라는 대답은 90점 이상은 못줄 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상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럼 90점 이상 100점에 근접한 대답은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변을 해주실까요?

 

 

 

<제각>  역대 어느 왕릉의 제각 보다 크고 규모 있게 지어져 있습니다.

 

 

세종의 총명함은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는 다독(多讀)보다는 정독(正讀)을 중시하는 독서 습관과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券)의 자세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책들도 당시 왕이 될 수 없는 대군들이 즐겨 읽던 시, 서, 화 등의 예술 쪽이 아니라 유학과 역사를 특히나 좋아한 것을 보면 어릴 적부터 제왕적 기질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세종의 수불석권의 자세에 감명 받아 저도 따라서 생활해보려 노력했던 적이 있었는데 말처럼 쉬운 게 아니더군요.

 

세종실록의 그의 행장을 보면 “진귀한 서적이나 글을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천재형이면서도 노력파였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영릉홍살문>  10개의 홍살이 정연히 서있는 영릉 홍살문

 

 

훈민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홍살문이 나오고 저 멀리 정자각이 보이며 그 위로 능이 살며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홍살문을 들어서면 빨리 능까지 한걸음에 달려가고픈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홍살문 왼쪽 기둥 바로 옆으로 보이는 건물이 수라간이고 오른쪽 기둥 옆으로 보이는 건물은 수복방입니다. 수라간은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정자각 왼쪽 아래에 짓고, 수복방은 능지기가 머무르는 곳으로 정자각 오른쪽, 비각 아래에 짓습니다.

 

수라간이 복원된 곳은 여주의 영릉과 화성의 융릉, 건릉 세 곳 뿐이며, 융릉과 건릉의 수라간은 영릉처럼 정자각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홍살문 바로 왼편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영릉계단>  영릉은 직접 능 역으로 올라가 관람할 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처음 세종대왕의 능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먼저 돌아갔을 때 경기 광주 서강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그 우실(右室)은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죽은 뒤 합장하였는데 그 뒤 능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어 1469년(예종 1) 석물은 그 자리에 묻고 이곳으로 이장한 것입니다. 그 후 석물은 1973년에 발굴하여 서울 청량리 영휘원(永徽園) 북쪽에 세운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습니다.

 

영릉은 북성산이 영릉을 향하여 신하가 부복하고 있는 형상으로 마치 꽃봉오리를 에워싼 듯한 형세로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인데다 정남향이어서 천하의 명당인데 원래 이곳에는 광주 이씨의 묘가 있었다고 합니다.

 

광주 이씨에서는 이곳에 묘를 쓸 때 봉분이나 비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지관이 했으나 이를 무시했다가 명당임을 쉽게 알아 본 왕실의 지관에게 발견되어 묘 자리를 빼앗겼다 합니다. 아무튼 이곳에 세종의 능을 만들어 조선의 명줄이 100년은 길어졌다는 확인 할 수 없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능을 만드는 제도에 가장 충실하게 따른 영릉의 형식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며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하였습니다.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 만 있으며 이때부터 석상의 수가 다섯에서 넷으로 줄었고 능 남쪽 하계(下階)의 동서 계단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맨 앞에는 양쪽에 대칭이 되도록 무인석과 무인석이 서 있고 그 뒤로 각각 석마, 가운데 봉분을 중심으로 양 옆에 8마리의 석양 그리고 담장인 곡장을 둘렀는데 이 구조가 대부분 조선시대 왕릉의 본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새로운 나라를 유교적 이상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확고부동 했습니다.

상왕이 세상을 떠난 세종 4년 주자소에서 새로운 활자체를 만든 것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 문교의 번성은 앞으로 더욱 크게 일어날 것이고 세상에는 도리의 지배함이 더욱 커질 것이다. 저 한나라와 당나라의 임금들은 재리와 병혁에만 정신을 쏟아 그것만을 국가의 급선무로 삼았지만 우리는 다르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로 우리 조선의 만세에 한없는 복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도 이 얼마나 자주적이고 당당한 선언입니까? 이러한 포부는 유학의 근본 도리를 정수로부터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문민통치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발언 아니겠습니까?

 

 

 

  

세종의 치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과학 발명품들인데 세종 때 발명품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농사와 아주 밀접하다는 것입니다. 수표, 측우기, 앙부일구, 혼천의 등등 모두 농사에 필요한 것들로 농사가 백성들의 생활의 근본이 되는 시절에 그가 백성의 생활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격루의 발명으로 조선의 시간을 통제하여 조선 8도가 정시에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자격루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통제한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눈물 나는 이야기인지를..)

 

 

 

<세종기념관>  기념관 앞에는 조선시대 과학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종의 위대함은 단순히 한글을 비롯한 위대한 발명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실현코자 했던 백성이 하늘 이라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현실에서 실현코자 하는 진정한 휴머니즘에 있습니다.

 

세종 9년 유감동이라는 여자가 39명에 이르는 관리들과 관계를 가진 사건을 비롯한 전 관찰사 이귀산의 처 유 씨의 간통사건(세종 5년), 처제와 관계를 가진 이석철 간통사건 등이 드러나 조정이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일을 엄하게 처벌 한 것이 마음에 아팠던지 세종 18년에 가혹하게 처리한 것을 후회하는 말을 하였으며 “여자들이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혼인의 시기를 잃은 까닭이다 " (세종 9년) “남녀의 욕구를 어찌 법령만으로 막을 수 있는가? “ (세종 15년) 라는 말들에서 그의 진보적이면서도 따뜻한 인간관을 알 수 있습니다.

 

관리들에 의한 사형이 공공연하게 집행되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목민관을 새로 파견하기 전에 꼭 손수 불러 나라 법을 집행하는데 백성에게 가혹하게 하지 말 것을 언제나 당부 했으며 “ 나는 사람의 죄가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더라도 만약에 사정에 따라 용서할 수 있다면 모두 용서하고 싶은 것이 나의 본심이요” 라는 기록에서 그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글 창제를 결심한 것도 법을 제대로 몰라 죄를 짓고 곤장, 투옥, 사형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어떻게 쉽게 나라의 법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의 산물입니다.

 

 

<용지>  왕릉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는데 대부분의 왕릉에선 복원되지 못했지만 융건릉과 영녕릉에서는 복원이 되어있습니다.

 

 

글이 정신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으며 문화를 이루는 핵심이란점도 말할 나위 없는 이야기 입니다.

 

한글창제를 위해 신하들의 반발을 피하고자 홀로 6년여 동안 비밀리에 연구하였으며 창제 선언 후 그 동안 키운 집현전을 통해 신속하게 보급시키는 정치력, 그 후 벌어지는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는 박식함에서 그가 단순한 책상물림이 아니란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악기를 제작하고 음을 정리하여 예(禮)를 세우고 조선시대의 모든 도량단위를 만들었으며 온갖 규범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500년 동안 일관된 통치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세종대왕.

 

이십 대부터 시작된 소갈증(당뇨병)으로 평생 병을 달고 다녔고 합병증으로 말년에는 거의 시력을 잃어 사람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으며 피부병으로 평생을 고생한 세종. 억울한 역모사건으로 장인을 비롯한 처가식구들이 처형 되는걸 막지 못한 점을 평생 자책하며 보내야 했으며 두 아들을 이승으로 먼저 보내 임금이기 이전에 한 아버지로서 인간적인 아픔도 겪은 세종.

 

그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백성이 하늘이라는 신념 속에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한 부단히 노력했던 세종대왕. 그런 세종의 민본정신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있음을 느끼시는지요?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대한민국은 과연?

 

중국 그 어떤 왕조도 250년을 넘겨본 적이 없음에도 500년씩 한 왕조가 이어졌다는 점은 경제, 군사적 힘 뿐 아니라 통치철학이 그 시대정신에 올바로 부합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미국이 경제, 군사적으로 아무리 강대국 이여도 그들이 세계를 포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 이념을 계속 발전시키지 못하는 한 그렇고 그런 제국주의 흥망사의 전철을 밟아 갈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분단된 상태로 미, 러, 중, 일의 강대국 패권 사이에 놓여있는 우리의 길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힘의 논리가 아닌 조화와 포용, 진정한 세계화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한류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 한류가 그들을 열광하게 하는지, 드라마와 영화, 노래 속에 녹아져 있는 우리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요한 것은 돈과 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신의라는 태도, 개개인의 자유 분망함 속에서도 조화를 중요시하는 자세, 고난을 뛰어넘는 낙천성과 너그러움, 무기교의 기교를 말입니다.  

 

이제 광복 6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우리 현대의 정치인들이 대한민국 500년의 기틀을 생각하며 정치를 한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발전적이고 아름다울까요?  

 

특히 집권당의 주축 세력과 집권당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욱 큰 다수 야당이 자당의 이익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서로를 비판하려 하기 보다는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키우는데 있다’ 라는 세종의 어록을 진정으로 이해하여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원칙의 문제 즉 상생의 정치, 지방분권, 세계화와 양극화, 작지만 강한 정부 등등의 문제에 보다 머리를 맞대고 협의 해 나간다면 얼마나 발전적이겠습니까?

 

 

 여주 시내 도로에 세워진 세종대왕상

 

 

이제 아까의 질문에 마지막 답을 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세종대왕이 조선에서 어떤 임금이냐?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세종, 그가 바로 조선 그 자체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2006 . 4 . 11

 

 

 

금강안金剛眼

출처 : 우회전금지
글쓴이 : 금강안金剛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