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시에서 오천항쪽으로 가다 보면 오천성을 조금 못 미쳐 왼쪽 언덕으로 조그마한 사당이 하나 나옵니다. 오천성을 찾아나선 길이였는데 궁금함을 찾지 못하고 올라가보았습니다.
사당은 단촐 하지만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을 보니
지자체에서 제법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사당 옆에는 조그마한 묘가 하나 있고 묘와 사당 사이에 사당의 의미를 밝혀놓은 비문이 서
있습니다.
<도미부인사당> 편액은 생뚱맞지만 솟을 삼문은 당당하다
비문의 내용은 바로 여기가 백제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인 도미부인의 설화의 역사적
장소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도미부인의 설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판 로렐라이 이야기라고 알려진 도미부인의 설화는 삼국사기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여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 도미는 백제 사람이었다. 비록 벽촌 소민(編戶小民)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도 절행(節行)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백제 개루왕(蓋婁王)은 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무릇 부인의 덕은 정결(貞潔)이 제일이라 하지만, 만일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좋은 말로 교묘히 꾀면 넘어가지 않을 여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왕은 도미의 부인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왕은 도미를 궁궐
안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신하에게 왕의 옷을 입힌 뒤 말과 몸종을 딸려 밤에 도미의 집에 가게 했다. 그에 앞서 왕은 사람을 보내 도미의 아내에게
왕이 온다고 기별했다.
가짜 왕은 도미의 집에 도착하여 도미 부인에게 “내가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네 남편과 내기 장기를 두어 내가 이겼다. 내일은 너를 왕궁으로 데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이제 너의 몸은 나의 소유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짜 왕은 도미의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께오서 망령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사온 데 어찌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곧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모시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물러나와 미모의 몸종을 곱게 단장시켜 대신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후에 왕이 속은 사실을 알고 격노하여 남편 도미에게 속인 죄를 물어 두 눈을 뽑은 뒤 조각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버렸다. 그리고 그 부인을 다시 강제로 범하려 하자 부인은 “지금 저는 남편을 잃은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은 월경으로 몸이
더럽사오니 다른 날에 목욕 재계하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해 왕이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은 그 길로 도망쳐 남편이 버려진 강가에 이르러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때 홀연히 조각배 한 척이 떠내려왔다. 부인은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거기서 도미 부부는 풀 뿌리로 연명하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蒜山) 아래로 가니 고구려 사람 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차스럽게 살면서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
<도미부인 묘> 과연 도미부인의 묘가
맞을까?
듣기만
해도 흐믓한 이야기인 도미부인의 설화는 사실 이곳 보령지역만의 설화는 아닙니다. 진해 에서도 도미부인의 전설이 내려오는데 거의 비슷하지만 몇 가지 다른
점, 도미가 정승이었다는 점과 도미부인이 이름이 아랑이라는 것 등 몇 가지 만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합니다.
이 도미부인의 전설은 월탄 박종화에 의해 [아랑의 정조]라는 소설책으로 소개되기도 했고 1984년에는 국립무용단에서
무용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현재 뮤지컬로도 기획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절개와 정조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알려진 도미부인의 이야기에는 하나의 의문이 발생됩니다. 보령과 진해 둘 중에
어디가 진짜 설화의 장소인가 라는 의문입니다.
직접
묘를 만들고 사당과 비문을 만든 보령, ‘아랑주’ 라는 지역 특산 주까지 만들어 선전하고 있는 진해. 그런데 얼마
전 백제 전문가이신 충남대 언어학 도수희 교수가 설화의 장소가 경기 광주(하남) 지역임을 주장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매우 장문의 논문이라 다 소개하기는 어려우나 몇 가지 주장을 추려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보령시에 ‘도미 항(道美 港)’이 있고, 도미 부인이 남편을 그리던 ‘상사 봉(相思 峰)’이 있으며 ‘미인도(美人島)’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보령 일대가 도미 부부가 실제로 살던 곳이라고 보령시 주장에 대해 원본의 내용에 강진(江津)은 있어도 항구(港口)는 없다는 점.
즉, 도미설화의 발생지는 바다를 낀 항구가 아니라 큰 강변이었다는 것과 천성도(泉城島)는 있어도 상사 봉과 미인도는 없다는 점을 들어 보령시의 주장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오해임을 밝히고 진해시도 ‘삼국사기’의 지명 천성도 와 경남 진해 가덕도(加德島)의 마을 이름인 천성도(天城島)가 동일한 발음이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임을 밝혔습니다.
만일 이 두 지역에서 도미 부부가 거주하였다면 저녁 무렵 왕의 옷을 입은 신하가 종들을 거느리고 궁궐을 나서서 그 날 밤
도미 집에 도착했다가 다시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당시
교통 여건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경남 진해웅천 지역의 경우 백제 땅이 아니라 신라 땅이었기에 진해라는 주장은 더욱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백제 개루왕때가 언제인가를 밝혀야 하는데 백제에는 4대 개루왕과 21대 개루왕이 있습니다. 근데 4대 개루왕때는 작은 부족국가 수준이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라는 부분을 생각할 때 21대 개로왕 시절로 추정됩니다. 제21대 개루왕은 성품이 호탕하고 호전적이었는데 개루왕 15년(469) 백제는 고구려의 남 변을 침범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급격히 국세가 기울어 개루왕 21년(475) 고구려 장수 왕의 남침으로 서울인
한홀(漢城)은 함락되고 개루왕은 비참하게 전사했다고 합니다. 절대적 패인은 개루왕이 고구려에서 밀파한 간첩 도림(道琳)과 바둑을 즐긴 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 대목은 도미전에서 왕과 도미가 내기장기를 둔 것과 부합됩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도미전의 사건은 제21대 개루왕
재위 21년(455∼475) 동안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미부인상>
자 그렇다면 그 당시의 백제의 수도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지금의 경기도 광주였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하룻밤에 도미의 집을 오고 갔다는 이야기로 비춰보면 광주 근처 어딘가가 도미부부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의 또 다른 증거는 당시 한강변엔 네 개의 큰 나루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두미진, 광진, 송파진, 삼전도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여기에서 두미진이란 곳이 ‘도미’와 발음이 유사한데 [용비어천가]와 [대동지지]에서는 두미진으로 [세종실록 지리지]와 [여의지지]에서는 도미로 기록하고 있기에 도미와 두미는 같은 곳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곳 도미진이 두 눈이 뽑힌 채 신음하는 도미가 그 곳에 버려졌고, 또한 도미가 조각배에 실려 떠내려간 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도미의 성명이 그곳 지명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성도는 어느 곳일까요?
진해 전설의 발생 근거지인 ‘천성(天城)’은 ‘삼국사기’ 도미전에 등장하는 ‘천성(泉城)’과 그 발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혼란을
줬는데 그러나 천성(天城)은 왜구의 가덕도 침범을 막기 위하여 마을 안에 쌓은 돌성(石城)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일 뿐, 도미전의 천성도와 진해
가덕도의 천성도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도미와 그 부인이 흐르는 강물 따라 떠내려가서 해후한 천성도(泉城島)는 임진강과 만나는 한강
하류의 어떤 섬 이였을 것입니다. (도교수는 한강 끝에 있는 일미도라고 주장하는데 일미도가 어딘지는 찾을수
없었습니다)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합류하는 지역의 지명이 교하(현 경기도 파주 交河)입니다. 이 지명은 백제 시대 지명 ‘얼매곶’에서 유래된 것인데 고구려는 남침하여 이 지역을 장악한 뒤 이곳을 ‘천정구(泉井口)’로 한역하여 불렀습니다. 이후 신라 경덕왕(757)이 교하(交河)로 개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천성(泉城)’은 천정구(泉井口)에서의 ‘천(泉)’과 바로 이웃한 진임성(津臨城-현재의 임진)에서의 ‘성(城)’을 절취하여 합성한 지명(‘泉+城→泉城’)이라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산산은 천성도에서 다시 만난 도미 부부가 도피하여 안착한 고구려의 영토라고 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
도미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역사적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백제 개류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 후 개루왕의 아들 문주왕은
서울인 경기도 광주(廣州)를 버리고 공주로 피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미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고구려 땅에 머물러 안주하는 셈이 됩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살매(현 충청북도 청주)까지 점령하였기 때문에 도미가 경기도 어디에 있던지 머물러 있던 지역은 자연스럽게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도미전]은 사실 몇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먼저 촌부에 불과한 도미가 왕과 장기를 둔다는 부분과 편호소민(호적에 등재된 평민)이라는 도미부인이 몸종을 이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대목에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몸종을 부리고 왕과 장기를 둘 수 있는 신분으로 봤을 때 도미는 백제의 고위관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왜 애써 도미의 지위를 격하 시키려 했을까요? 도미의 신분을 이처럼 비하한 것은 그 아내의
절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적인 꾸밈이라고 도수희 교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눈을 잃은 남편을 찾아 배에 몸을 실은 도미부인 <조선
삼강행실도>
삼국사기 이후에도 [도미전]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조선 세종은 도미전을 ‘삼강행실도’(1432년)에 수록하여 열녀의 표상으로 삼았고 ‘동사열전’을 비롯, ‘동국통감’ ‘오륜행실’ ‘신속동국행실’ 등에도 한결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종 때
‘삼강행실도’에서는 도미의 벼슬에 대한 부분이 없는데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도미라는 사람은 백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도미라
사은 백졔나라 벼 사)”이라고 밝혀 도미의 신분을 격상시켰습니다. 이는 원본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 의도인 것 같습니다.
도미의 지위가 어떻던 간에 [도미전]은 열녀의 의미를 확산 시키고자 조선시대의 집요한 노력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저는 도미의 설화를 접하면서 정조, 열녀 등의 유교적, 개인적 의미보다는 권력에 맞선 어느 부부의 눈물겨운 투쟁의
의미가 더욱 다가왔습니다.
요즘 한참 성폭력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한나라당 어느 국회의원까지 식당에서 여기자를 추행하면서 온 사회가 들끓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서 따라오는 이야기인 남성들의 동물성 등등의 비난 섞인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히 마음이 좀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런 성폭력, 성희롱의 문제가 남녀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성희롱은 문제는 절대 남,녀간의 유교적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간의 생물학적 차이로
발생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권력의 문제입니다. 어른이 아이를, 상사가 부하직원을, 힘있는 남자가 힘없는 여성을 성적으로
굴복시킴을 통해 본인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정신적 질환을 동반한 권력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왜 왕과 맞서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눈을 버리더라도 절대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꼿꼿한 관리의 모습과 행복한 안락을 뿌리치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라면 불행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도미부인의 모습에서 절개라는 유교적 의미보다 더욱 크고
숭고한 정신을 느끼게 됩니다.
지명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거의 실화일 가능성이 큰 도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바로 도미부부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인간에게 가장
숭고한 모습은 부와 권력의 횡포와 운명의 장난 속에서 절대 굴복하지 않는, 인간이 만든 사회적 질서에서 사회의
주인은 돈이나 권력이 아닌 인간이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장엄한 인간존엄의 정신을 느끼게
됩니다.
천 년을 넘어서도 불굴의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도미전]
세월이 아무리 오래 흐르고 가치가 변한다 해도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고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지만, 그 고동소리 마저 부끄럽게 만드는 현재 우리의 유약한 사랑이 다시금 입술을 깨물게 합니다.
2006 . 3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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