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스크랩] 해남 윤씨 고택 `녹우당` - 그 가문 유래와 <고산 박물관>

바보처럼1 2006. 4. 22. 23:23
10월초에 해남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서울로부터 버스로 곧장 달려가도 6시간이 넘게 걸리는 아주 먼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너무 가보고 싶은 곳이였습니다.
해남에는 대흥사, 미황사란 유명한 사찰도 있고, 땅끝마을이란 의미있는 관광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해남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는 '녹우당' 이 있기 때문 입니다.
 
녹우당은 해남 연동(蓮洞)에 있고 연동은 덕음산 기슭에 있습니다.  따라서 녹우당은 산이 막 시작되는 곳에 위치해 있는것입니다.
 
 
 

 

윤선도고택 마을입구
 
 
어떤 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가문의 전통과 가풍, 학문적 연원을 이해하지 않고 그들이 살던 곳만을 이해하려는것은 어찌보면 내용보다 형식만을 보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어떻게 쌓았는지 그 집안에서 어떤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는지 살펴보는것이 고택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해남의 가장 영향력있고, 부유했던 가문이였습니다. 주차장과 매표소가 녹우당에서 약 100m 는 떨어져 있지만 역시 예전에는 이 근방 전부가 해남윤씨가 관리하던 땅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차장 뒷쪽에 있는 아담하지만 분위기 있는 연지 또한 해남 윤씨가 관리하던 곳이였을 것입니다.
 
사각형 연못에 원형 섬을 만들어 놓은 모양은 전형적인 조선 연못의 모양이고 단지 바라보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직접 건너가 볼 수 있도록 대나무 다리를 만들어 놓은 문화적 센스가 돋보입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원한 언덕이 나오고 가운데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곳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고산 윤선도 유적지 관리 사무소가 있고 그 뒤쪽으로 녹우당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고산 박물관 이 있습니다.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입니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어초은 1476~1543)이 연동에 살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해남 양반 가문의 전형적인 건물입니다.
 
호조판서를 지낸 어초은 윤효정 공이 해남 윤씨의 입향 시조입니다. 그는 벼슬을 버린 이후로는 거의 두문부출하면서 은인자중 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해남 윤씨의 재력은 벼슬이나 장사로 만들어진것은 아닙니다. 사실 해남 제일의 재력가는 해남 정씨 였다고 합니다.
 
어초은 공이 바로 정씨 가문의 딸인 귀영(貴瑛)과 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재력이 생기게 되는데 임진왜란 전 재산분배는 자식전원에게 고루 분배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꽤많은 재산을 분배 받았을거라 짐작됩니다. 
 
당시 어초은 공은 8촌까지 다 합쳐 기껏 20여명이 채 안되는 미약한 가문이였습니다. 그러나 해남 정씨와의 혼인과 영남사림파 김종직의 문인이였던 최부(1454~1504)와 사승관계를 맺으면서 당당히 해남의 사림으로 자리를 잡게 된것입니다.  이때 영남사림파와 연결된 윤효정의 학문적 연원은 이후 윤씨 가문의 당파성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해남 윤씨는 동서로 나뉘어 질때는 동인이 되고 남북으로 갈라질때는 남인에 속하였습니다. 
 
 

 

녹우당 뒷쪽에 있는 어초은 내외분의 묘
 
 
 
그 당시 재력있는 집안 따님과 결혼한 영재가 한마을에 정착하고 유능한 후손을 배출하여 입향시조가 되는경우가 있는데 어초은 공도 그런 경우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재산이 많아진 상태에서 그 후손들도 수성과 근검절약을 실천하여 누대에 걸쳐 재산을 크게 모았다고 합니다.
 
해남읍에서 대둔산을 향해 가는 도중에 펼쳐진 많은 논밭에서 소출된 곡식이 거의 해남 윤씨의 것이였다고 하는 얼마나 재산이 많은 집안이였는지 짐작 할 수있습니다. 
 
윤효정은 본부인에게 4남 2여를 두었는데 그중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해남 윤씨는 명실상부한 양반 명문으로 발돋음합니다.  첫째 윤구는 벼슬이 성균사성에 이르렀지만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하다가 기묘사화로 26세 나이에 고향 해남으로 유배되었고 그후 벼슬을 포기하고 은거생활을 합니다.  후대 윤씨들도 비슷한 행로를 걷는 분들이 많을것을 보면 뜻이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벼슬을 포기하고 은거를 택하는건 아무래도 가풍인것 같습니다.
 
윤구는 본부인에게서 2남 1여를 두었는데 딸은 이중호와 결혼하여 이 사이에 후에 동인의 핵심인물이 된 이발(1544~1589)이 태어납니다. 이발은 조광조의 자치주의를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했으나 서인의 거두 정철의 처벌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다가 서인의 미움을 받아오던중 정여립 사건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맏아들 윤홍중은 과거에 급제한후 예조정랑과 영광군수를 지냈고 을묘왜변때 해남현감이 방어를 포기하려하자 직접 현감을 위협해 왜적을 물리친 용감한 분이였습니다. 윤구에게는 아들 사회가 있었으나 큰 잘못을 저질러 호적에서 삭제했고 동생 윤의중의 아들 유기를 택해 대를 이었습니다.
 
윤구의 둘째 아들 윤의중은 과거에 급제한 후 동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평안도 관찰사, 공조,예조판서, 좌참찬등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영의정이였던 노수신과 교분이 두터웠고 자기 누이의 아들인 이발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윤의중은 당시까지 윤씨 가문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르지만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라 불리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서인의 공격으로 죽었습니다.
 
정여립 사건으로 연루되어 처형된 사람만 천여명이 되었고 이때 동인세력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호남지방 사류(士類)의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윤씨의 사돈 집안인 이발의 가문은 몰살되었고 윤의중은 귀향도중 죽었으며 윤의중의 누이이자 이발의 어머니 윤씨는 끝까지 역모를 부인하다가 매맞아 죽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해남 윤씨들이 서인에 대해서 씻을수 없는 원한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의중에게는 유심과 유기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가집 윤홍중에게 유기를 입양시켜 가문을 이었습니다.  유기는 윤의중에게서 133명의 노비와 550여 두락의 재산을 물려 받는데다가 종손으로서 윤홍중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재산이 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기도 아들이 없어서 형 유심의 둘째 아들인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를 입양하여 종손으로 삼는데 윤선도는 생부와, 양부 모두에게 재산을 상속받아 노비가 6백명이상, 논밭 1천 두락 이상에 이루는 막대한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시가 문학사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 공은 1587년 아버지 윤유심의 둘째 아들로 한양 동부 연화방(서울 종로구 연지동)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덜살때 당시 종손이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큰아버지 유기에게 양자로 입적하여 해남 윤씨의 대종손이 되었으니 어초은 공의 4대 종손이 되는것입니다.
 
 

 

고산 사당
 
 
 
해남 윤씨 가문의 윤선도 이후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는 공재 윤두서(1768~1715)는 윤선도의 증손자입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또 윤두서의 외증손자입니다. 이렇게 남도 실학의 계파가 이어지는것입니다.  윤선도에서 윤두서까지 이어져 오는 내력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습니다.
 
이처럼 해남 윤씨는 당시의 적법한 절차를 지키며 순서에 의해 입양원칙을 지켜 종손을 선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양자가 반복되면서 종손을 중심으로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되었습니다. 즉 구조적인 요인으로 부가 장남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이며 이는 해남 윤씨 가문의 경제력을 가속화 시켰읍니다.  따라서 녹우당은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호남 사림의 전형적인 고택의 모습인것입니다.
 
 
 
고택 오른쪽에 단층 한옥으로 깔끔하게 설립된 <고산 박물관>이 있습니다.
개인 사가에 가문의 유물로만도 박물관이 필요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히 집안이였는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보통 관광객들은 녹우당을 보러 왔서 녹우당만 보고 그냥 가버리거나 시간이 나면 한번 쑥 훌터 보고 그냥 나가지만  이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유물의 비중은 거의 녹우당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유물들이 해남 윤씨 가문이 이룩해 놓은 업적의 전부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유물중 가장 많은 비중이 공재 윤두서의 작품들인데 이름을 고산 박물관이라고 붙인것은 좀 문제인것 같습니다. 그냥 해남 윤씨 박물관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한것 같습니다. 
 
 

 

고산박물관
 
 
 
역시 가장 제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전시물은 국보 제 240호인 윤두서의 '자화상' 과 '유하 백마도' 입니다.
 
 

 

고산박물관의 <자화상> 진품이 아닙니다. 현재 진품은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입니다.
 
 
 
저에게 해남 윤씨, 윤두서를 접하게 해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해을때의 충격이 생각납니다.  그 정밀한 사생과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듯한 눈빛, 파격적인 구도와 비장미.. 몇일동안 그 그림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림 앞 바닥에 앉아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 한분이 의아한 표정으로 혹시 조상이여서 그러냐고 물어봐서 속으로 한참 웃었습니다.
  
아무래도 재질로 봐서 진품이 아닌것 같아서 윤선도 유적지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정색을 하며 진품이라고 하여 긴가민가 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일 날 회화관에서 진품을 보고 확실히 그곳의 작품은 전시용이란걸 깨달았습니다. 아마 관리소 직원은 아직도 그게 진품인줄 알고 있을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그림을 보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분이 지나가면서 '소도둑놈 처럼 생겼네' 라고 말하며 지나가서 혼자 속으로 '맞아 맞아' 했었습니다.
 
 <자화상>  40대 남자의 삶과 고뇌, 관직에 나가본 적은 없지만 세상의 일을 자기 책임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어느 선구적 선비의 불굴의 정신, 그 비장함에 대해 제가 조금 더 감당할수 있을때 따로 글을 쓰려합니다.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
 
 

 

유하백마도 
 
 
역시 공재 윤두서의 '유하백마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윤두서의 명작중 하나입니다. 버드나무 밑에 기품있게 서있는 하얀 말한마리. '유하백마도'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빨리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바람부는 버드나무 아래 당당히 서있는 백마가 누구를 상징하는지를 말입니다. 
 
 

 

동국여지지도.  윤두서. 종이에 채색, 113 X 71.5 cm
 
 
 
김정희의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지기전에 이런 지도를 윤두서가 제작했다는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대해 자세히 표기되어 있지 못한 단점이 있으나 삼도지방의 섬들이 상세히 표시되어 있는것은 장점입니다. 특히 산의 높낮이를 농담으로 표현하여 마치 부감법을 이용한것 처럼 그린것은 화법을 이용한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기법은 후대에 진경산수화 즉 겸재 정선의 작품등에서 유감없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윤두서는 동국여지지도 뿐 아니라 일본지도도 제작했습니다.  당시 지도를 제작한다는 의미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합니다. 학문적으로 실학과 연관되었다는걸 반증하고 있는것입니다.
 
이밖에도 보물482호 윤선도의 <산중신곡집>, 윤씨가보와 전가보회, 윤선도 친필등 3천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니 이 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꼭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해남 윤씨가 이곳에 정착하고 사림으로써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과 고산박물관에 대한 설명히 간단히 마쳤습니다.  솔직히 하고 싶은 이야기에 십분지 일도 하지 못했지만 다음번 녹우당편에 그 아쉬움을 달래기로 하고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2005 . 11 . 19
 
 
금강안金剛眼
출처 : 우회전금지
글쓴이 : 금강안金剛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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