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스크랩] 이제하를 만나러 카페 마리안느에 가다

바보처럼1 2006. 5. 30. 00:11

이제하를 만나러 카페 마리안느에 가다

 


카페 마리안느로 가면서 나는 잠깐 기억에서 가물거리는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을 떠올렸다. 야생마의 갈기처럼 휘날리던 갈색 머릿결과 상대를 빨아들일 듯한 커
다란 눈, 비에 젖은 듯한 목소리. 1960년대 그녀는 잘 나가는 가수였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세기의 목소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날카로운 가시를 품은 장미처럼 위
험하게 아름다웠다. 잘 나가던 그녀는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지만, 곧 파경하여 롤링스톤즈
의 믹 재거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무렵 동거남과 함께 마약복용 혐의로 체포된다.
그것은 그녀가 그 동안 보여준 현실에 대한 노골적인 발언과 애정행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
난 극히 사적인 사건일 따름이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아직도 노래하고 있다. 마치 오래 전 그녀가 불렀던 <
작은 새>처럼. "누군가가 이 세상에 내려보낸/한 마리 작고 귀여운 새가 있었죠/그 작은 새
는 이 세상으로 내려와/거친 바람 속에서 살았어요/바람 속에서 태어나/바람 속에 잠이 드
는/이 작은 새는/누군가가 이 세상으로 보내준 거죠" 갈대가 흔들리는 듯한 바이브레이션이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한 오! 마리안느. 만일 서울의 평창동 거리 한 귀퉁이에서 그녀의
이름을 만났다면, 그건 60년대를 살아낸 시인 이제하가 마음의 연인에서 현실로 불러낸 카
페 이름일 것이다. 마치 나는 옛날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양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 마리안
느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갓 볶아낸 커피냄새를 뒤로 하고, 이미 거기에는 시인 이제하 씨
(66)가 언제나 그렇듯 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앉아 있었다.
"그 모자는 언제쯤 벗을 건가요?" 인사 대신 나는 그렇게 물을 뻔했다. 하지만 그에게 '모
자'에 대해 묻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다. 소문에 따르면 그의 모자를 벗기려다 끝
내 옷벗은 기자들도 있다던가 어쨌다던가. 하여튼 막 들어선 마리안느는 영화배우이자 가수
였던 그녀의 비밀스런 내부 같았다. 모던함보다는 그리움과 미련이 짙게 깔린 무대. 천장에
는 꺼진 할로겐 등이 갤러리처럼 사방에 매달려 있다. "마리안느란 이름이 참 좋군요." 나는
그가 말하는 마리안느 페이스풀을 듣고 싶었다. "그 가수 노래도 좋아하고, 영화도 기억에
남고 해서 카페 이름을 그렇게 붙였어요. 요새 다시 재기해서 부른 노래는 완전히 허스키
보이스가 됐더라고. 재기하고 나서 부른 노래들도 상당히 좋아요."
그의 연인 마리안느는 올 3월 14일 처음 문을 열었다. 그는 왜 하필 이곳에 마리안느를 열
게 되었을까. 11년째 그가 평창동 작업실을 지키고 있는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다. "10여 년
전에 이 자리가 '포도나무'라는 카페였어요. 그 때 이곳에 처음 들어와 봤는데, 계단이 있고
공간이 재미있드라고. 미당 선생 돌아가셨을 때 미당 선생 아들이 친구라서 여기에서 만나
저녁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여기 집주인이 미당과는 고종사촌 관계래요. 그러던 차에 이제
나이 더 들면 학교도 못나가고 글도 못쓰면 사후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같아서 시작했죠
뭐. 쌀값이라도 해볼까 해서."
천하의 이제하가 쌀값 타령을 다한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또다른 이유가 분
명 있음직하다. "문인 친구들 이리 끌고 와서 커피장사라도 좀 할까 해서." 사실 그는 평창
동이 프랑스의 몽마르뜨르처럼 예술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본래 평창동은 무당들이 많이
살던 무당 동네였다. 옛날에는 과수원과 묘지도 많았고, '자하문밖'이었으니 옛날에는 아주
시골로 쳤다. 그런 땅에 가나아트니 토탈미술관 등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화랑가로 변모해
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제하가 꿈꾸는 몽마르뜨르가 멀었다. 화랑을 제외한 문
화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가 문인 친구들을 이곳으로 불러내려는 것은 몽마르
뜨르 건설의 야심찬 속내인 셈이다.
그 속내를 알아 차렸는지 이 카페에는 그와 친한 소설가 윤후명 씨가 자주 들러가고, 신경
숙 씨 부부도 가끔 찾아온다고 한다. "친하게 지내는 문인들이 누구죠?"라고 묻자 그는 주
저없이 "나는 여자들과 친하다"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김형경, 조은, 황인숙, 정은숙 등
등의 이름을 나열했다. "지금은 낭만적인 공간이 없어요. 60~70년대만 해도 어려운 시절이었
음에도 낭만이 살아 있었다고. 김수영, 전혜린이 막걸리집에서 술마시고 시를 읊으며, 고래
고래 노래도 불렀지. 그런데 지금은 다들 조용히 술 마시고 집으로 쏙 들어가기 일쑤에요.
옛날 명동에 가면 갈채니 뭐니 해서 문인들이 20~30명씩 모여들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공간이 없어요. 이 카페가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거였다. 쌀값만큼이나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마리안느가 많은 문인들의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그는 시인이고 소설가다. 그것도 꽤나 잘 나가는 작가다. 그
를 아는 이들은 아마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라는 소설을 기억할 것이다. 이
소설은 1985년 그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2년 뒤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판을 거듭하며 팔려나간 소설은 그에게 인세가 아닌 몇 푼의 상금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잘 나가던 그로서도 글만 써서 먹고 산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기였다. "소설로 먹고 살수 없
으니까. 이것저것 부업을 하는 거지. 신문에 영화칼럼도 쓰고, 음악칼럼도 쓰고, 시집에 캐리
커쳐도 그리면서. 원고료라고 해봐야 단편소설 한편에 40~50만원인데, 그걸 매달 쓸 수도 없
는 노릇이고. 우리나라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제일 힘들어요. 문학이라는 동네가 제일 힘든
동네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책을 안읽어요. 그러니 소설인들 잘 나갈 리가 있겠어
요. 문인으로 산다는 게 천형이지 천형."  
천형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때려치울 수 없으니, 글 쓰는 일이란 어쩔수 없이 천형을 견디는
일이다. 사실 그가 여러 분야를 두루 하는 것은 그가 두루 재주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쓰기 위한 한 방편이다. 소설만 써서는 먹고 살 수 없으니, 다른 것으
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내가 "참 여러 얼굴을 가지셨군요."라고 했을 때 그
는 "주종이 소설이죠."라는 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소설가, 시인, 화가, 가수, 영화칼럼니스트, 그리고 카페 주인.
이게 내가 아는 그의 직업들이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분야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1937년 밀양의 한 시골 구석에서 출생. 1957년 <현대문학>에 <설야>와 <바다>로 미당 선
생에게 추천받으며 험한 문단의 가시밭길을 자초. 그해 시로도 모자라 <신태양>지에 소설
<황색 강아지>로 문학병 재확인. 1961년 연애사건을 빌미로 다니던 홍대 서양화과를 때려
치움. 1973년 첫 창작집 <초식>(민음사)을 세상에 내보냄. 1980년 세 차례 석유 파동으로
가게와 집 풍비박산. 식구들 뿔뿔이 흩어지고 이 일을 계기로 떠돌이 및 제멋대로 생활 시
작. 1985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나 수중에 남은
것이 영 수상함. 1992년 영화칼럼집 <이제하의 시네마천국>(우리문학사)을 내며 부업에도
열중. 1998년 노래 발표회 및 선시집 <빈들판>과 <이제하 노래모음>(나무생각)을 내며 노
래하는 시인, 시 쓰는 가수로 주변의 시샘을 한몸에 받음. 그해 시인 김영태와 2인 드로잉전
을 열어 자신이 화가였음도 여실히 증명. 2003년 평창동에 카페 마리안느 오픈.
참 숨가쁘게 살았다. "그냥 나는 아웃사이더로 살고 있는 거지 뭐." 하지만 싫든 좋든 그는
중심에 개입돼 있었고, 자유롭게 변방을 오고 갔다. 내 눈에는 그의 전방위적인 이력이 너무
나 근사하게 보인다. "장콕토처럼 외국에는 여러 가지 하는 문인들이 많아요. 그런데 우리나
라는 여러 가지 하면 손가락질하고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봐도 좀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림이 시고, 시가 소설이며, 소설이 영화고 음악이다. 조금씩 다르지
만 조금씩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치환되고 스며든다. "문학 속에 영화적인 요소가 얼
마든지 들어올 수 있고, 그림의 구도라든가 인물 성격이 장치를 바꿔 소설로 치환되기도 하
죠. 문학은 사고력과 상상력으로 들어오고, 그림과 영화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들어온다는 것
이 다를 뿐이에요."   
어차피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족속은 몇 안된다. 안되는 것을 하겠다고 고집 부리는 것도 모
양새가 좋지 않다. 글만 쓰느라 밥을 굶어가며 장렬하게 최후를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제 그는 회갑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차 있고("산다는
게 지옥이지."라고 말하면서도), 아직도 애인들이 넘쳐나고("왜 우리 같은 사람은 스캔들이
있어도 신문 1면에 나오지 않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아직도 근사한 목청으로 노래도 부르
고(그는 이렇게 말한다. "날계란을 다시 먹어야 하나?"), 아직도 더 많은 소설을 쓰기를("사
는 게 소설이니까") 바라고 있다. 더욱이 새롭게 문을 연 까페 마리안느가 잘 돼 무수한 문
인들과 화가들과 인디밴드의 아지트가 되기를 바라고(그들과 연애할 수 있다면) 있다.
그러고보니 카페는 주인을 쏙 빼닮았다. 카페의 분위기와 인테리어를 살펴보면 그의 다양한
직업들을 추측해낼 수 있을 정도다. 우선 카페를 열고 들어가면 방명록과 함께 시집 <빈들
판>과 그가 낸 CD가 쌓여 있다. 카페 천장에는 갤러리용 할로겐 등과 벽에 걸린 그림액자
가 걸려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라이브로 노래할 수 있는 작은 무대가 있으며, 무대 뒤편에
는 영화를 보여주는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스크린 밑에는 상영일자와 함께 <버팔로 '66 >,
<까마귀 기르기>, <천국보다 낯선> 등의 영화가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오디오에서는 이국
적인 파두('운명'이라는 뜻을 지닌 'Fado'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그리움과 향수,
우리나라의 민요처럼 한의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와 제3세계 음악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이것들만 봐도 그가 뭐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눈치챌 것이다.
카페에 대한 얘기를 좀더 해야겠다. 어쩌면 그는 이 카페를 통해 그가 이제껏 추구해온 바
를 실천하려는 모양이다. 할로겐 등은 멋으로 달아놓은 것이 아니라 작은 전람회라도 열어
볼 요량으로 설치한 것이다. 라이브 무대는 금요일이나 주말에 한시간 정도 그가 노래하는
시간을 내볼 심산으로 만들었지만, 언더그라운드 아마추어 가수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만들었다. 스크린 또한 상업영화를 피해 제3세계 영화와 인디영화를 상영하려고 걸어놓은
것이다. 참고로 그는 비디오 테잎과 DVD를 1500여 개나 모아놓았다. 그리고 평일 오전에는
시나 소설을 쓰는 젊은이들이나 동아리들에게 마음놓고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장소를
내줄 생각이다. 그러니 이 카페가 단순히 커피 파는 카페만은 아닌 셈이다. 아 참, 한가지
더. 마리안느에 가면 사람보다 우수어린 눈을 지닌 투투를 만날 수 있다. 투투는 자신이 개
라는 것을 망각하고 사람인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오면 상대방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자꾸만 인생을 논하려고 한다. 그러니 거기에 가거든 투투에게 개 취급을 하지 말 것을 권
고한다. 
처음에 나는 그에게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앞에 달았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이
제는 소설가 이제하로 바꿔달아야 할 것같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젊고, 훨씬 열정적이며,
훨씬 자유로웠다. 자유로운 삶. 누구나 꿈꾸는 삶이지만, 누구나 온전히 자유롭게 살 수는
없다. "최대한 자유롭게 살거나 자유롭게 살려고 노력했으면 해요. 생각하는 것의 10분의 1
정도만이라도 자유를 실천하면서 살면 10분의 1은 더 행복해질 겁니다." 이제껏 그는 그것
의 10분의 1이라도 실천하려고 애써왔다. 이제 그는 그가 살아온 자유로운 삶을 차근차근
갈무리하고 있다. 이미 문학동네에서 소설전집 6권이 나왔고, 곧 6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개인 전람회도 한두 번 정도 더할 생각이다. 두 번째 CD도 준비하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배도 좀 줄여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며 그는 또 담배를

피워문다.
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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