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그는 웃고 있다.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그 물살의 무늬 위에 나를 가만
히 띄워 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 마리으 황
나비는 아니다. 물살을 흔들며 바닥으로 바닥으
로 나는 가라낝는다. 한 나절, 나는 나의 언덕
에서 울고 있는데, 도연(도연)히 눈을 감고 그는
다만 웃고 있다.
*현대문학(1955.9) 수록
꽃을 주지적-상징적-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꽃
*주제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자각.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30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으 1 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은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 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은 움켜 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으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 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체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접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헤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逆)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非情)의 수목들에서 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눈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소련군에 대항하여 일으킨 헝가리 의거(1959.10.23)에 자극을 받아 쓴 작품이다.
원래는 56행이었으나 뒤에 49행으로 줄였다
이 작가의다른 작품들이 인식임에 비하여 이 시는 철저하게 의미로 씌어졌다.
*주제는 자유 수호를 위한 저항의식.
*보듬도: "안고"의 사투리
<꽃을 위한 서시(序詩)>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춤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이 시는 사물의 내재적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추구의 결과애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의 자세만 보여주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추억"은 시이의 모든 체험과 예지를 가리키고 있고, "신부"는 꽃을 뜻한다.
*주제는 사물의 내재적 의미의 탐구.
<꽃밭에 든 거북>
거북이 한 마리 꽃 그늘에 엎드리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조심성 있게 모가지를 뻗는다.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머리를 약간 옆으로 갸웃거린다. 마침내 머리는 어느 한 자리에서 가만히 머문다. 우리가 무엇에 귀 기울일 때의 그 자세다.(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그의 모가지는 차츰차츰 위로 움직인다. 그의 모가지가 거의 수직이 되었을 때, 그 때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있는 대로 뻗은 제 모가지를 뒤틀며 입을 벌리고, 그는 하늘을 향하여 부수히 도래질을 한다. 그 동안 그의 전반신은 무서운 저력으로 공중에 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울음이 아니었을까.)
다음 순간 그는 모가지를 소롯이 움츠리고, 땅바닥에 다시 죽은 듯이 엎드렸다.
*시지<늪>(1949)수록.
"꽃밭"은 현실 사회요, "거북"은 시인이다.
거북이 머리를 뻗는 행위는 이상의추구이거나 신을 향한 추구일 것이다.
*주제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의 깊은 자아의식.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은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부재의 존재인 그는 나와 관계를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그리고 나의 존재성 역시 그와 마찬가지이게 마련이다. 허무로부터 나의 존재를 이끌어 내 줄 수 있는 것은 그 누가 나의 이름을 명명해 줄 때에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존재론적 고뇌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산 다 화(山茶花)>
그 해의
늦은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산다화를 적시고 있다.
산다화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산다화의
명주실 같은 늑골이
수없이 드러나 있다.
<처 용(處容)>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고대 설화를 빌어 인간의 존재 양식을 상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바다"는 삶의 현장, "상수리나무"는 인간을 가리킨다.
<눈 물>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을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릴케의 장(章)>
세계의 무슨 화염에도 데이지 않는
천사들의 황금의 팔에 이끌리어
자라나는 신들
어떤 신은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돋쳐 나는 암흑의 밤으 손톱으로
제 살을 핥아서 피를 내지만
살점에서 흐르는 피의 한 방울이
다른 신에 있어서는
다시 없는 의미의 향료가 되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천사들의 겨울에도
얼지 않는 손으로
나무에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패배와 살륙의 전장에서
한 개의 심장이 살아나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하늘에서 죽음의 재는 떨어지는데
이제사 열리는 채롱의 문으로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나래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
*"하늘에서 죽음의 재가 떨어지는" 불안한 상태에서 시인이 바라고 있는 것은 평화요,희망이다. 이 시는 암흑 속에서 광명을 찾고 있고, 겨울같은 현실 속에서 봄날의 꽃을 찾고 있으며, 혼돈 속에서 기도와 명상을 추구하고 있다.
이시의 소재가 되고 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바로 김 춘수가 파악한 이러한 이중관념의 화해적 표상으로 볼 수 있다.
<부 두 에 서>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셔지지 않는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 떼가 놓친
그 바다.
*초 현실주의 경향에 족하는 작품.
하루의 일과를 마친 사나이들이 늠름하고 굳센 의지와 의욕으로 바라본 바다---그것은 안정감을 주는 "온전한 바다"이다.
<뜰>
아침 햇살이
라일락꽃잎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한 아이가 나비를 쫓는다.
나비는 잡히지 않고
나비를 쫓는 그 아이의 손이
하늘의 저 투명한 깊이를 헤집고 있다.
그대의 눈은 나의 거울이다.
*주지적이며 상징성이 짙은 작품.
마치 조각하듯이 미래를 다듬어 보는 순결한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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