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양평 양자산에 터 잡은 화가 김영리씨

바보처럼1 2007. 7. 10. 22:09
[전원속의 작가들]양평 양자산에 터 잡은 화가 김영리씨
"자연이 들려주는 동화 화폭에 담아"
 화가 김영리에게 항금리 작업실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꽃 한송이’가 탄생되는 공간이다. 작가가 그린 난로가 있는 작업실 풍경.(밑에 사진)
밤이 깊어가고 있다. 산짐승들마저도 졸린듯 말이 없는 시간. 산그림자가 길게 목을 늘이고 창가를 기웃거린다. 눈 녹은 계곡물 소리만이 도란도란 말을 걸어 올 뿐이다. 오늘따라 잠을 잊은 작가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듯이.

이 순간만은 세상 모든 것이 작가의 것이다. 사방의 적막함도 혼자만을 위한 ‘침묵의 세레나데’가 된다. 산속의 겨울밤이 정겹다. 작가는 붓을 들어 계곡물에 화답해 본다. 일찍이 이처럼 마음이 풍족한 적은 없었다. 자연 안에서는 모든 것이 여유롭다. 마치 어머니 품안에 안긴 아이처럼. 작가는 자연의 무릎에 걸터앉아 자연이 들려주는 동화를 화폭에 받아 적는다. 때론 자장가에 취하기도 한다.

화가 김영리(46)씨가 경기 양평 양자산 자락에 터를 잡은 지도 햇수로 벌써 10년. 대학과 유학생활로 서울과 미국, 호주 등의 도시를 휘돌다 멈춘 곳이다. “투쟁적 삶만 강요하는 도시는 저에게 상처가 됐습니다. 정신적 몸살로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이곳에 닿았지요.” 마음이 힘들 땐 육체를 힘들게 하란 말처럼 텃밭을 가꾸는 농민이 됐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것이 약이되어 나의 아픔이 치료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치유하는 자연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열정이란 이름 아래 꺼지지 않는 내면의 체증이 점차 잦아들었던 것. 자연이 어머니의 약손이 된 셈이다.

작가는 어느 순간부터 치유된 내면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어한다. 꽃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하는 의식이다. 이젠 누군가에게 뭔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그만이다. 끝없는 욕망에 스스로 벽을 만들어 갇혀 있던 예전의 모습이 헛될 뿐이다.

봄철엔 민들레 꽃씨가 허공에 날리며 ‘비움’을 말해 준다. 새로운 창작과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선 민들레가 되란다.

“살아 있는 것들을 제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다만 저 나름대로 그릴 뿐이지요.” 드러내지 않는 작고 아름다운 야생화는 더욱 그렇다. 그들이 들려주는 대로 손을 빌려줄 뿐이다.

“제 사정이 절박할 땐 붓을 안 잡아요. 꽃들에게 저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강요하게 되거든요.” 그림은 자연과 대등한 대화의 선물이란다. “슬플 때 그린 그림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어 싫어요.”

산과 들과 풀을 보면서도 문뜩 문뜩 깨닫는 것이 많다. 잡초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에서도 뭔가의 힘을 감지한다. “삼라만상은 저를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꾼 같아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버리는 기쁨을 알게 하고 겸손하라는 교훈도 잊지 않는다. 자연을 닮아가는 삶이 그래서 행복하다.

오후 햇살이 캔버스와 마주한 작가의 얼굴 위로 생전에 꽃을 즐겨 그렸던 반 고흐를 그려 넣는다. 반 고흐는 붓꽃 양귀비 들장미 글라디올러스 아네모네 등의 꽃들과 복숭아나무 아몬드나무 아카시아나무 자두나무 배나무와 같은 꽃나무들을 자주 등장시켰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엔 이렇게 적었다. “자연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아. 자연이 말을 걸면 내가 속기로 받아적는 셈이지.” 반 고흐는 자연에 매료되어 평범한 자연물들을 걸작으로 그려냈다. 작가 김영리에게도 그런 점이 어렴풋이 읽혀진다.

오후 5시. 작가는 작업실 옆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작가가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엄마와 아내로 변신하는 시간이다. “맛있게 요리하고 청소하는 작업도 가족을 즐겁게 한다는 점에서 저의 꽃그림과 일맥상통하지요.” 가족을 화목하게 만드는 일이 예술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저녁 시간 퇴근해 돌아온 남편 조중현(50)씨와 쌍둥이 두 딸, 늦둥이 막내 아들이 식탁에 마주했다. 동치미와 땅속 질항아리에서 꺼낸 김치가 시원하다. 구수한 된장국 냄새는 고향의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손수 농사 지은 것들이다. 정성의 땀이 녹아 있으니 조미료에 범벅이 된 식당 음식과 달리 마음까지 개운케 한다. 잘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식사를 마친 가족들과 남한강 강가에 섰다. 물결이 이리로 다가오는 듯 밀려온다. 뛰어들고 싶은 환상에 빠져본다. 물이란 참으로 감성적이다. 삶에 들뜬 현대인들을 시원하게 식혀주기도 한다. 강가의 버들개지는 벌써부터 봄을 품고 있다. 겨울은 이미 봄의 기다림을 시로 써 내려가고 있다. 시의 음률에 물결이 춤춘다.

작가는 가끔씩 이 강가 어디쯤에 있는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강을 바라본다. 흐르는 물이 거울 되어 지나온 여정을 비춘다.

무엇인가를 더 가지려고 앞만 보고 달리면서, 가족을 위한답시고 오히려 더 힘들게 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제야 위안을 주는 삶과 그림을 알 것만 같다. 화폭은 꽃과 시의 그림이야기가 담긴 전원일기가 됐다.

물과 산자락에 마음을 담고 사는 작가의 작업실에 불이 꺼졌다. 두메마을 항금리의 집들이 어둠속에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간다.

글 편완식, 사진 서상배기자

/wansik@segye.com

<연 보>

▲1958년 경북 영일 출생 ▲1982년 홍익대 미대 졸업 ▲1984년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 ▲1991년 프랫 인스티튜트 M.F.A(뉴욕) ▲개인전 12회(서울 8회, 뉴욕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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