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신도시 근교 농촌마을인 성석동에 위치한 화가 이종목(46·이화여대 교수)의 작업실 풍경이다. 도시 변두리가 그렇듯 각종 창고들이 어수선하게 논밭을 깔고 앉아 있다. 7년 전 처음 이곳에 똬리를 틀었을 때의 고즈넉한 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도 논두렁과 밭두렁, 그리고 산으로 난 오솔길의 흙냄새가 여전히 살가운 곳이다. 작가는 왜 알 수 없는 형상들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일까. “어떤 생각이나 의식도 없어요. 그저 ‘나를 내맡기는 의식’이지요.” 하루에 수십장씩 그렇게 드로잉한 종이들이 작업실 한켠에 쌓여간다. “예기치 않은 형상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는 법은 없다. 얻은 형상들은 세포 속 무의식에 차곡차곡 재워졌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튀어 나온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과의 교감이자 자연의 암호들이다.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의 소리를 수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은 안테나요, 헛돼 보이는 붓질은 자연에 주파수를 맞추는 신성한 몸짓처럼 보인다. 작가의 기질에 따라 잡히는 전파도 다르게 마련. 작가의 정체성도 여기서 출발하는 것일 게다. 긴 적막으로 가라앉은 작업실 분위기가 일순 바뀐다. 슈베르트의 라자루스 오라토리오가 진공관 오디오인 매킨토시 275를 통해 흐르면서 무거움을 걷어낸다. “음악은 감성을 항상 예민하게 만들어주지요.” 작업실 벽면엔 클래식 기타가 놓여 있다. 진공관 음색이 더욱 정감 있게 가슴을 파고들쯤 작가는 붓질을 잠시 멈추고 명상에 잠긴다. 음악은 보는 것이요, 그림은 듣는 것이라고 번슈타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동강의 황새여울을 그릴 때 그는 현장에서 밤샘하며 물소리를 들었다. 물과 같이 놀며 느끼고 그림을 소리로 들었다. 작가에게 철저하게 자기를 향한 절대고독이 필요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자신을 비우고 일상의 번잡함에서 한발짝 벗어나는 훈련이 필요한 것도 주파수를 제대로 맞추기 위한 절대조건들이다. 그의 희망사항도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다. 가장 힘든 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을 꼽았다. 그는 겨울 산과 물을 그리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눈에 덮인 바위와 그대로 드러난 산세의 발가벗은 모습은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맛이 일품이지요.” 작가는 산에 푹 빠져 1996년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이후 산의 부분인 계곡과 물에 시선을 돌렸다. “물은 은유적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흐름 속엔 선(仙)이 있고 ‘내 안의 풍경’을 담을 수 있단다. 물은 작가에서 물처럼 살라한다. 그가 물가를 즐겨 찾는 것도 마음공부를 위해서다. 작가는 요즘 그의 몸을 빌려 탄생된 형상들과 일대일 만남을 즐긴다. 어떤 구도속에 그것들 짜맞추기보다 병렬로 늘어 놓는 식이다. 형상 하나하나가 나름의 목소리를 내도록 배려 했다. 그의 그림이 보는 이에 따라 바위 같기도 하고 때론 새와 사람, 나무로 읽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의 작품이 기호나 상징으로 비쳐질 만큼 모노톤으로 단순해지는 이유를 알겠다. 결국 작가는 동양미학의 근본인 여백에 충실한 것이다. 작가는 물에 적신 화선지 위에 붓질을 하거나 때론 손에 먹물을 발라 밀어넣는다. 머금은 물이 작가가 되어 먹을 번지게 한다. 물이 자연의 암호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그림이 안 돼도 괴로워 하지 않는다. 안 되면 안 되는가보다 하며 물처럼 산다. 여행스케치를 떠나면 한동안 그림이 잘 풀린다. 망칠 땐 ‘에이 모르겠다’ 내던지기도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 그림이 잘된다. 완전한 포기가 여백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밤이 깊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작업실 창문을 때린다. 작가는 오늘따라 늦도록 작업실을 떠날 줄 모른다. 바쁜 작업일정이라도 있는 것 처럼. “집이 작업장인 아내에게 작업을 방해가 되지않기 위해서지요.” 일산신도시에 살고 있는 그의 아내는 바로 서양화가 신현경씨다. 결국 귀가 시간에 신경을 안 써도 되니 아내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라며 웃는다. 그에게 화가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극과 극을 수시로 오가는 삶이지요. 천국과 지옥을 들락날락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작가는 선택받은 사람이란다. 글 편완식, 사진 이종렬기자 /wansik@segye.com
연보 ▲1957년 충북 청원 생 ▲1983년 서울대 미술대 졸업 ▲2001년 한·중·일 수묵화전(국립현대미술관) ▲2002년 한국현대미술 중남미 순회전 ▲2003년 한국현대미술 유럽 순회전 |
2004.01.05 (월) 1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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