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조각가 강관욱씨

바보처럼1 2007. 7. 10. 22:12
[전원속의 작가들]조각가 강관욱씨
"예술은 구원-바다는 해탈”
 점토로 모형을 만들고 있는 작가.
서해 바다의 파도가 하얀 포말을 머금고 이리로 달려 온다. 작가 강관욱(59·조각가)이 손을 내밀어 물을 떠올려 입맞춤을 해본다. 다정한 이에게 건네는 인사마냥 정겹다. 혼자 있어도 적적함을 몰라 스스로 별나다는 그가 오늘 바닷가에 섰다. 파도만 보면 일순간에 모든 번민이 사라진다는 그에게 바다는 분명 해탈이다.

“바람에 떠밀려 중력을 거스르는 파도가 빚어내는 형태는 아름다움의 정점이지요.” 중력을 거슬러 서 있는 인간을 닮았다. 미세하고 고운 물 입자를 그는 돌로 쪼아내고 있다. 이른바 파도와 물방울 조각이다. 습관처럼 파도가 좋아 넋 놓고 들여다보기도 한다.

서산 해미 가야산 자락의 작업실에서 작가는 몇날 며칠이고 혼자서 돌과 씨름하면서 진정으로 혼자라는 사실, 인생과 예술의 가치가 거기에 있음을 터득해 간다. 돌 앞에선 모습이 그래선지 선승을 닮았다.

1992년부터 서해 연포해수욕장 인근 근흥에서 3년, 서산 백리포에서 7년을 보냈다. 오염된 바다가 괴로워 이제 산으로 작업공간을 옮겼다. 교수 10년 바다 10년, 이제 산에서 10년을 보낼 작정이다.

바다는 그래도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어머니 품속 같다고나 할까. 10년간 바닷가 작업실을 고집했던 이유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읜 것이 그를 뿌리깊게 모성애를 그리워하는 작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전북 군산이 고향인 작가는 조선업을 하던 부친 때문에 바다를 앞마당 삼아 자랐다. 부친이 타계하자 밤마다 연애 시절의 편지를 꺼내 읽으며 식음을 전폐했던 어머니도 몸이 허약해져 4년 만에 아버지 뒤를 따랐다. 그는 지금도 산에 올라 멀찍이 바라보던 그때의 바다를 잊지 못한다. 슬프고도 고독해진 영혼을 위무해준 그 바다. 작가는 그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걷게 한 바다가 고맙다. 아마도 ‘예술의 길’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소복을 차려 입은 어머니와 할머니로 대표되는 작품들은 한국 여성의 삶의 애환을 은유하고 있다. 순수와 순결, 순종, 체념, 고요, 기다림 등의 정서를 녹여냈다.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 속엔 우리 현대사의 아픔도 담겨 있다. 비구상보다 구상을 고집하는 것도 감동을 주기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1991년 교수직을 스스로 사퇴했을 땐 사람들은 이해를 못 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 부정이나 무능 등 무슨 피치 못할 사유가 있으려니 짐작하기 마련이다. ‘한쪽(작품하는 일)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서’ 학교를 그만뒀다는 대답을 사람들은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더욱더 주위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진도에 있는 빈집에서 혼자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TV와 라디오도 없는 폐가의 비닐하우스 속에서 흙장난(소조작업)을 하고 있는 꺼칠한 중년의 사내를 만나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술적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작가에게 어쩌면 예술을 교육하는 학교는 정착지가 되지 못했다.

돌가루로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작가는 진도에서 요양하며 소조작업을 6개월 했으나, 도로가 좁아 돌을 나르는 중장비가 드나들지 못해 다시 어렵게 찾아낸 곳이 서해 태안 바닷가였다.

바다가 보이는 작업실은 시설도 빈약하고 초라해 찾아오겠다는 이들에겐 “도시가 싫어질 때 오십시오. 대접해 드릴 것은 바다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신이 있다면 우리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하는 노동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손조각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인체에서 얼굴 다음으로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어 함축적 표현에도 제격이란다.

작가는 매끈한 서구 조각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자생 조각을 추구한다. 전통적인 화강암이나 오석의 석질에서 오는 우툴두툴한 질감을 바탕으로 표면을 갈지(연마) 않고 정으로 쪼아서 마무리하고 있다. 은은한 맛을 주는 박수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우리 돌은 입자가 굵고 투박해 사실조각에 부적합하다는 인식을 깼다.

“수지가 맞으면 예술이 아닙니다. 예술이란 타고난 자의 천형일 뿐, 선택된 성질의 유리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효율적인 작업방식으로 지난 30여년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랄 수밖에 없다. 작가를 이런 식으로 지속시켜온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뭔가를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본능적 욕망이 아닐까.

“고통의 강에서 허우적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행복에 지친 안일한 영혼에겐 고통을 일깨워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들 영혼을 성숙시키는 길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의 붉은 기운에 작가의 얼굴이 취했다. 산자락 작업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왠지 허허롭다.

글 편완식, 사진 이종렬기자/wansik@segye.com

<연보>

▲1945년 전북 군산 출생 ▲1975년 홍익대 미대 조소과 졸업 ▲1991년 전남대 교수 사직 ▲1999년 이중섭 미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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