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당신’으로 국민시인 반열에 오른 도종환(51) 시인은 비로소 소원을 이뤘다. 충북 보은군 내북면 속리산 자락의 산과 산을 좌우 앞뒤로 한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쓸쓸한 황토집에 50여년을 쉼없이 달려온 육신을 부렸기 때문이다. 벌써 1년이 지났다. 2년 전 충북 민예총 회원 연수 중 앉은자리에서 쓰러진 후 1년 동안 학교를 휴직했다가 최근엔 아예 사직서를 냈다. 만 28년(10년은 해직 기간) 동안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동안 애환도 많았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벌여 놓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수북이 쌓여 있는데…. 아이들과 전교조 동료 교사들에게 ‘미안’한 건 어쩌나…. 청주 분평동에서 공군사관학교를 지나 문이삼거리를 거쳐 보은으로 가는 피반령 고갯길은 속리산 말티재와 흡사했다. 우측으로 돈다 싶으면 반대로 꺾이고, 올라가는 듯하면 내려오고, 죽 뻗는 듯하면 꾸불꾸불한 길이 마치 꼬인 내장 같다. 얼마나 올라왔는지 잿마루께에선 귀까지 울렁울렁했다. 시인이 알려준 대로 마을 안길을 한참 지나 길 끝나는 데까지 가서 차를 세웠다. 그곳부터는 걸어야 했다. 컹컹 짖어대는 개 사육장을 옆으로 하며 산속 오솔길을 500m쯤 더 가니 한 폭의 그림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구구산방(龜龜山房)’으로 명명된 황토집이 눈에 들어왔다. 집 둘레는 잔디가 아담하게 깔려 있고, 검은색 자연석이 작은 산맥처럼 마당 한쪽을 장식하고 있다. 다섯 그루의 소나무와 가지런히 놓인 돌 탁자 하나와 녹색 의자 두 개가 정원 소품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집 옆 허름한 창고에는 목을 다친 닭 한 마리가 갑자기 등장한 외지인을 경계한다. 세 마리는 들짐승에게 잡혀 먹고 유일하게 남은 닭이라고. 시인은 상처 난 닭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집 앞을 가로질러 쉼없이 소리를 내는 깊은 개울물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막 봉오리를 터뜨린 버들개지가 바람결에 흔들거리고, 곧 필 것 같이 꽃눈이 잔뜩 부푼 매화나무가 손짓을 한다. 시인은 목장갑을 낀 채 장작을 패다가 기자를 맞았다. “어여쁜 선녀나 밥해 주는 우렁각시보다 나무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인의 바람은 소박했다. 장작을 때야 집을 덮일 수 있기에 하루 서너 시간씩은 어김없이 장작을 쪼개는 게 일이다. “여긴 텔레비전도 안 나오고 신문도 안 들어옵니다. 오직 새 소리만 들리지요.” 텃밭에 근대나 무 고추 등을 심어 반찬도 하고 닭 모이로도 쓴다. 집을 빌려준 화가가 심어 놓은 것이지만 시인은 그 밭에 물도 주고 풀도 뽑아주어 가을이면 먹을 만큼은 거둔다. 거실 선반에 올려진 광주리를 보니 늙은 호박을 비롯해 강낭콩 감자 곶감 등이 수북하다. 한 켠에는 서른 뿌리 남짓한 파 시루가 눈에 띈다. 군데군데 잘린 걸 보니 찌개 끓일 때 뚝뚝 잘라 넣은 모양이다. ‘밤중에 봄비가 다녀갔나 보다/ 마당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잠결에도 비 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굴뚝새만한 작은 새가 앉았다 날아가자/ 숨어 있던 빗방울 몇 알이/ 아랫가지 위로 톡톡톡 떨어진다/ 삐쫑 빼쫑 혀를 내밀어 그걸 핥아먹고는/ 입술을 훔치는 모과나무 꽃순이/ 푸르게 반짝인다/ 오늘은 묵은 빨래를 해야겠다/ 약 냄새 밴 옷들도 벗어 빨아야겠다”(‘춘분’). 점심 때가 되자, 시인이 밥을 짓고 반찬을 준비한다. 어릴적 장 보러 간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차려주는 밥상 같다. 통에 담긴 김치 등 밑반찬 몇 종류에 갈치조림까지 올라왔다. 호박을 썰어 넣은 근대국은 맛이 제법이다. 시인은 요즘 버몬트 숲에서 살다가 간 미국의 환경운동가 스콧 니어링에 흠뻑 빠져 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니 이런 대목이 나오더라고요. 삶을 간소화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은 멀리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가질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읽혀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만들어갈 것….” 시인은 이 문구를 책상 위에 붙여놓고 그대로 따라한다. 하루에 네 시간 노동하고, 네 시간은 자연과 사람 만나고, 네 시간은 읽고 쓰고…. “흩어진 나무토막과 잔가지들을/ 차곡차곡 쌓듯 내 삶도 이제는/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가 잡힐 것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그리고 간소하게 저녁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둠이 숲과 계곡을 덮어오자/ 땅 위에 있는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별을 향해/ 손을 모읍니다”(‘저녁숲―스콧 니어링을 그리며’). 청주 무심천 변에서 태어나 지독한 궁핍과 외로움, 해체된 가족 속에서 자란 시인은 공짜나 다름없는 사범대를 졸업해 마침내 안정된 직장인 교단에 서게 된다. 그러나 차마 쏘지는 못했지만 80년 광주시민들을 향해 겨누었던 총구에 대한 기억은 시인을 일어서게 했다. ‘목마와 숙녀’를 주절거리던 문학청년은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며 허무주의에 물든 과거와 결별했다.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결혼 2년 만에 눈을 감은 아내, 새근거리는 두살배기 딸…. 시인에겐 고통과 시련이 뒤따랐다. 참교육운동과 해직과 구속과 베스트셀러 작가와 10년 만의 복직…. 시인은 심신이 지쳤다. 1인 5∼6역을 감당하며 지내온 세월이 육신을 병들게 했다. 병명도 뚜렷하지 않다. 의사도 몸과 마음을 너무 혹사해서 생겼다는 것밖에는 설명이 없다. 시인은 모든 걸 버리기로 작정했다. 심지어 서재 앞 창을 가로막던 책꽂이마저 버렸다. 산속에서 쓴 산문을 묶은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좋은생각)에서 시인은 새롭게 발견한 진리를 내보인다. “무딘 연장을 날카롭게 바꾸어주는, 쇠보다 단단해 보이는 숫돌도 보이지 않게 제 몸이 깎여져 나가는 아픔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그의 언어는 이제 자연의 섭리에 한발 더 다가가며 인생의 깊이와 거룩함까지 배어 나온다. 새삼 이문재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시와 삶이 하나이듯이 양심과 사랑도 그의 안에서, 그의 삶에서 하나이다.” 보은=조정진기자/jjj@segye.com
◆연보◆ ▲1954년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89년), 복직(98년) ▲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고두미 마을’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동화 ‘바다유리’등 ▲제8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
2004.02.23 (월) 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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