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아무리 하찮은 것도 존재의미 있지요"

바보처럼1 2007. 7. 10. 22:24
[전원속의 작가들]"아무리 하찮은 것도 존재의미 있지요”
경각산 자락에 작업실 마련시인 안도현씨
시인 안도현(43)을 전북 전주에서 만났다. “운전 시작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다”는 말을 들으며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전주 시내를 지나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가노라니 왠지 조마조마했다. “초보라 불안하냐”고 묻는 말에 본심을 들킨 듯해 민망했다.

차를 대고 돌담을 따라 들어가니 조그만 초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북 완주군 경각산 산자락에 작업실 ‘구이구산(九耳九山)’을 마련한 건 1998년. 97년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난 이듬해였다. 산문집 ‘사람’에는 ‘작업실, 구이구산’이 소개돼 있다.

“이른바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시도때도없이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전화는 도대체 외로워할 틈을 주지 않았고,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겨우 글 몇 줄 끼적이는 시인 주제에 무슨 작업실이냐고, 누군가 핀잔을 준다 해도, 빚을 내서라도 나는 현실 도피하고 싶었다.”

몇 달을 헛걸음한 끝에 낡은 집 하나를 구했다. 한 십여 년 비어 있던 집이라 마당은 덤불숲을 이루고 있었고, 마루에는 먼지와 쥐똥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집을 손보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마당에는 잔디를 깔고, 산딸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계수나무를 심었다.

‘구이구산’이란 이름은 그의 동무들이 붙여줬다. ‘구이’는 완주군 구이면에 따왔다. ‘구산’은 달마의 선법을 전래해 그 문풍을 유지해 온 아홉 산문이라는 뜻과 중국의 아홉 명산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맑은 우물 같은 시인, “세상을 망원경으로만 보지 말고 때로 현미경도 사용하고 싶은” 안도현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곳. 새소리와 풍경소리, 밭에서 작업하는 소리만 들린다.

“도시에서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 아파트 평수만큼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작업실을 수리하고 나서 나는 이 집이 거느리고 있는 대지 면적보다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한 것 같았다.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과 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파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소리들이 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안도현의 시는 ‘아주 작고 하찮은 것’에 대한 애정으로 꽉 차 있다. 그의 시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85)에는 치열한 현실 인식이 드러나 있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80년대에 20대를 보낸 그에게 ‘시의 사회적 관심’은 숙제고 숙명이었다. 그 시절 내내 시가 세상을 어떻게 만나고 바꿀 것인가 고민했다. 시가 사회를 바꾸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검열했다. 그런데 그것이 의무가 되면서 부담스러워졌다.

시는 자연에 대해 눈뜨고 어울려 사는 삶을 추구하는 시로 변모한다. 89년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직된 후 94년 복직해 장수의 산서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놓은 시집 ‘그리운 여우’가 기점이다. “시골 학교에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꽃이며 풀, 나무 이름에 관심을 갖게 됐죠. 80년대에 커다란 것들을 쫓아갔다면, 그때부터는 작은 것 속에 들어 있는 큰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름 없는 들꽃’이 ‘애기똥풀’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

안도현의 시는 쉽게 읽힌다. 산문처럼 쓰여졌지만 술술 읽힌다. 시인 신경림은 “쉽게 쓴다는 느낌은 독자로 하여금 그의 시에 쉽게 접근하게 하고, 이것은 시인의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깊은 천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한다.

안도현은 시를 힘들게 쓴다. “수십 번 고치면서 시를 쓰고 부호 하나로 전전긍긍한다”고 말한다. “시를 대할 때 완벽해야 겠다, 독자에게 완벽하게 전달해야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돌아선 지 올해로 8년째. “글만 쓰고도 밥 굶기지 않겠다”고 약조하고 나서야 부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학교에는 미안하지만 글만 쓰니 좋단다.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니 그럴 수밖에.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 구이구산에도 매일 출근하려 했으나, ‘세간의 일이 바빠’ 일주일에 서너 번밖에 못 들른다. 글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이것저것 잡문(雜文)을 많이 쓰는 것도 시인의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올해는 잡문을 줄이고 시를 많이 쓰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시 외의 것은 다 잡문이다. “시가 가장 절실합니다. 나한테도 제일 잘 맞는 것 같고요.”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시간 변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시가 그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시가 따뜻한 국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떠먹는 사람이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시는 ‘그리운 여우’에 실린 ‘겨울 강가에서’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완주=글·사진 이보연기자

/byable@segye.com

<연보>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원광대 국문과 졸업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당선돼 등단 ▲1984∼89년 전북 이리중학교 교사, 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94∼97년 전북 장수군 산서고 교사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등 ▲시와시학 젊은시인상(96) 소월시문학상(98) 원광문학상(2000) 노작문학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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