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밤 10시를 넘겨서야 비로소 작업에 들어간다. 칠하고 긁어내고 덧입히는 붓질 소리만 외로운 밤이다. 일산과 경계를 이루는 경기 파주 동패리. 산속 울창한 숲에 푹 파묻힌 김찬일(42·홍익대교수)씨의 작업실은 그렇게 밤으로 내닫고 있었다. 유리 칸막이 너머엔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아내 손진아(35)씨가 서울 시립미술관 전시 준비로 밤을 잊고 작업 중이다. 부부의 작업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사위의 어둠속에서 얼굴을 비죽이 내민다. 아내가 유리칸막이 문을 열고 알 수 없는 말을 던진다. 남편은 엉뚱한 말로 동문서답이다. 같은 공간에서 작업해도 전혀 다른 생각의 세계에 살다 보니까 흔히 벌어지는 풍경이다. 그러나 부부는 그 말들을 이해한다. 각자 내면과의 독백이라는 것을. 새벽 3시. 작가가 작업실 앞 벤치에 벌렁 누워 담배 한대를 문다. 쏟아지는 별, 시원한 숲 바람에 머릿속 분진까지 담배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이 시간만은 온 세상이 내 것이다. 전원생활의 멋이 이런것일 게다. 작가들은 그림 세계가 종교와 같다고들 한다. 그 안에서 생각을 시작하고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주변은 괴로워도 본인은 행복하기에 작가 남편들은 때론 ‘등처가’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결혼 초엔 아내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의견을 물어오면 솔직히 의견을 개진했다. 아니 자기중심적으로 판단을 했다. 자연스럽게 좋다기보다는 꼬집는 얘기가 주류를 이뤘다. 그날 저녁은 냉기류를 감수해야 했다. 이젠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쁜 평보다는 간혹 가다 ‘저거 좋네”라며 말을 던진다. 작가 부부로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간섭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자신만의 작품이 나오게 마련. 잘됐을 때 박수 한번 주면 그것이 최고란다. 김찬일씨는 아내와 함께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7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전원작업에서 탄생된 것이 ‘점 시리즈’다. 자연은 모든 것을 환원시켜준다. 작가는 모든 형상적 요소들을 가장 단순한 점으로 환원시켰다. 많은 무기들이 등장하는 무협지에서 결국엔 검객의 검이 무림을 통일하듯이. 남들이 가는 대로 가는 것은 재미가 없게 마련. 작가는 남들이 안 쓰고 안 하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 고정관념을 깨고 반대로 나가고자 한다. 회화의 기본 요소인 점과 직선, 종교화에서 주로 쓰는 대칭 구도를 과감히 채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점 시리즈 이전엔 음악을 듣고 그 느낌을 화폭에 옮기거나, ‘커피는 45도일 때 가장 입맞춤처럼 달콤하다’는 식의 일상을 소재로 했다. 인간과 자연의 문제도 다뤘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너무 감미롭고 감각적이고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라앉은 앙금을 흙탕물을 일으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변화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유학을 선택했다. 감정의 밑바닥까지 긁어 새롭게 풀어내기 위해서다. 그 출발이 점 시리즈다. 작가는 국제아트페어나 비엔날레에 가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뻔한 재료를 가지고 그림을 그려도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그 많은 작가들이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신선하고 신기할 정도다. 자기 것이 정립 안 되면, 다시말해 독창성이 없으면 통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양 다리 걸치기, 이런 느낌 저런 느낌의 작품은 설 자리가 없다. 작가의 이론과 생각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극히 평범한 얘기 같지만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작가는 평면 구조나 기존 미술재료에 만족하지 않는다. 평면을 유지한 채 입체를 구현하려 한다. 회화이면서 탈회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평면과 입체의 팽팽한 긴장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캔버스 위에 오브제인 철심으로 점을 세우고 유화물감과 돌가루 안료를 칠하고, 깎고, 긁고, 얹고 하는 과정의 반복으로 각도에 따라 색감과 질감이 달라지는 것을 얻어내고 있다. 특정 색으로 규정 할 수 없는 혼색의 효과, 중성적 노력이 작가를 당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기묘한 질감과 여러 가지 상념이 자욱하게 번지는 화면은 페인팅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 물질, 오브제인 셈이다. 판화적 요소를 끌어들여 연금술적인 공정을 통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그런 회화, 탈회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빈 의자를 인생과 작가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아내 손진아씨. 욕망으로 부대끼는 것이 인생사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마치 빈손이나 빈 의자가 상징하듯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의자 표면의 틈새와 긁힌 자국은 욕망이 남긴 상처다. 남편은 회화이면서 탈회화를, 부인은 비어 있어야 진정한 미덕인 빈 의자를 말한다. 부존재(빈 의자)는 존재(앉는 이)를 전제하고 있다. 부부가 없음을 통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 놀이했던 동양화의 정신이 담겨 있다. 밤의 깊은 적막과 씨름 한 작가의 얼굴에 아침 햇살이 비친다. 아내는 작업실 떠난 지 오랜 듯하다. 허전하다. 내가 왜 그림을 그렸을까. 머리에 발동을 끄려 라면 한 그릇을 끓여 배를 채운다. 내가 그림 그리기를 잘했구나 하는 뿌듯함과 함께 잠이 몰려온다. 감정의 기복이 이렇게도 변덕스럽단 말인가. 작가는 그 긴장감으로 살아간다 하지 않던가. 편완식기자/wansik@segye.com |
2004.07.12 (월) 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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