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김포서 판화작업 하는 강승희 교수

바보처럼1 2007. 7. 10. 22:57
[전원속의 작가들]김포서 판화작업 하는 강승희 교수
'새벽의 사유'를 그린다
 
김포평야의 너른 들에 바람이 분다. 이리저리 쏠리는 볏잎은 초록의 출렁임이다. 그 사이로 난 논두렁길 끝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김포시 하성면 마곡리. 판화가 강승희(45·추계예술대 교수)씨는 17년간의 홍대 앞 생활을 청산하고 3년 전 이곳에 찾아 들었다. 프레스와 각종 공구, 철판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작업실 내부는 말 그대로 ‘작은 공장’이다. 30도를 웃도는 더위도 아랑곳없이 작가는 동판과 한창 씨름 중이다. 부식방지제를 바른 동판 위에 각종 판화공구를 붓 삼아 이미지를 그어 나간다. 형태가 그려진 동판을 부식통에 넣는다. 10분부터 3∼4시간까지 시간차 부식으로 작가는 명암을 조절한다. 때론 원하는 톤을 얻기 위해 이런 과정을 150여회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끝없는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다. 확대경으로 부식된 부위를 살펴본 작가가 이번엔 룰렛이나 스크래퍼 등 이름이 생소한 공구들로 깎고 다듬고 긁어내는 마무리 작업을 한다.

한참만에야 담배 한대를 피워 문 작가가 창 너머 들판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초록에 취해 본다. 들바람에 땀을 식힌 작가가 동판을 프레스에 걸고 면(綿)으로 만든 종이 위에 판화를 찍기 시작한다. 프레스에서 판화를 꺼내는 작가의 표정이 사뭇 긴장되어 있다. 도공이 가마에서 구운 도자기를 꺼내 볼 때의 모습이 아마도 저럴 것이다.

찍어낸 작품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작가는 그것을 버린다. 동판작업을 수정 보완해 다시 프레스에 건다. 하나의 판화가 3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장의 판화를 얻기까지는 수많은 버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위에서 판화를 마구 찍어 내면 되는 것쯤으로 인식하고 쉽게 작품을 달라고 할 땐 허망스럽다. 실제로 작가에게서 제대로 된 판화 한 장을 얻기 위한 노력은 그림 한 장보다 결코 쉽지가 않다.

요즘 일부 화가들이 색분해를 통해서 찍어내는 판화는 엄밀히 말해 인쇄물이지 판화는 아니다. 일종의 포스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는 판화로 어렵다는 수묵화의 질감까지 표현해 내고 있다. 아쿠아 틴트(식각요판)을 이용, 송진가루를 동판의 특정 부위에 골고루 뿌린 뒤 열을 가해 부착시킨 후 다시 부식통에서 부식시키는 방법이다.

가느다란 송진 입자를 중심으로 점 부식이 이뤄지면서 잉크를 더 머금게 만들었다. 정겹고 온화한 수묵화 느낌의 퍼지는 부드러움이 가능해진 것이다. 부식 정도와 우연성의 효과 등 판화 기법과 표현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오히려 먹물 붓으로는 불가능한 어둠 속의 또다른 어둠까지 표현이 가능하다. 부식 한 번에 하나의 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검정 톤의 다양성에 작가는 푹 빠져 있다.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두고 발효식품의 숙성된 맛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지난해엔 중국 충칭(重慶)에서 초청전시를 가질 정도로 수묵화의 본고장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쓰촨(四川)미술학원에선 교환교수 요청을 했을 정도. 한국 판화의 새 장을 열고 있는 그에게 국내외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20년간 새벽 풍경에 매달려 왔다. 새벽은 노동도 휴식도 아닌 사유의 시간. 한국인의 뼛속 깊이 간직된 감수성과 동양적 명상세계를 드러내기엔 새벽이 제격이란다. 새벽 둔치 위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모습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고향 제주 앞바다를 본다. 일렁임이 없을 땐 마치 조용한 호수와 같은 제주 바다. 새벽녘에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녹차 향 나는 명상에 빠져들게 된다고 한다.

새벽은 요란을 떨기 전 세상의 본질을 먼저 드러내 보인다. 새벽을 사랑하는 이는 그래서 진리를 사랑한다하지 않던가. 작가는 새벽이 들려주는 온갖 속삭임을 들으며 김포 강변과 강화 바닷가를 달린다. 새벽빛이 얼마나 우아한지, 새벽 내음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알았다.

작가는 오늘 또 하나의 새벽 감성을 길어 올리기 위해 어디론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커다란 여백의 화면 속 조그만 배한 척처럼 고독함을 넘어 어떤 자유로움을 찾기 위해. 아직도 표현할 대상이 많고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다. 조용한 산사나 강을 찾아 혼자 떠나는 이유는 아직도 비어 있는 가슴을 채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가면 나무, 새, 물 소리, 바람 소리, 순수한 공기가 따뜻하게 맞아주기 때문이다. 동양적 명상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몸짓이다. 작가는 흑백의 동판화에 한국적 감성과 서정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살림집으로 쓰는 작업실 2층에 ‘보물’이 있다고 가리킨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고순옥(44)씨와 미술대학 지망생인 두 아들(고1,중3), 막내딸(초등5)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는 분위기 있는 정겨운 남자다.

글 편완식기자, 사진 송원영기자/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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