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를 자청한 이왈종(59) 화백의 제주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올해로 15년째다. 사람들은 그가 교수직(추계예술대)을 포기하고 홀연히 서울을 떠났을 때 이해보다는 놀라움으로 받아들였다. “작가는 외로워야 합니다. 외로움은 작가에게 매우 유익한 것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창조한다는 일이 어찌 외롭지 않고서 가능하겠습니까.” 52세에 집을 옮긴 후 45년 간 딱 한번만 외출했다는 일본 작가 구마가이 모리가스의 독락(獨樂)이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파리를 뒤로하고 타히티로 떠난 폴 고갱이 그랬듯이 작가는 서울 사람과 주저없는 화려한 결별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어느 속박 없이 자유롭게 붓 가는 대로의 삶을 위해서다. 모슬포 해변 토방에 머물렀던 추사가 그랬던 것처럼 ‘유배생활의 고독’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갖춘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왈종씨가 작업실 앞 바닷가에 서 있다.사람은 많이 만날수록 욕심이 불어나고, 자연은 바라볼 수록 욕심이 자제되는 이치와 같다. “제주 생활 1년이 지나면서 산과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초만 바라보아도 소화제를 먹은 듯 속(마음)이 풀어졌어요. 간사한 마음을 무디게 해주는 것도 자연이지요. 사람들과 부대끼면 예민하고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회지 사람들이 그렇지요.” 그가 제주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학 시절 동백꽃 위에 눈 내리는 제주 풍경이 가슴속에 찍혀 버렸습니다. 하얀 눈 위로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동백꽃의 영롱함에 반해 버렸지요.” 그 동백나무는 사라지고 없지만, 작가는 그 언저리에 지금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작가의 그림 속에 동백나무가 많이 등장하고 그 가지들엔 보고 싶은 사람과 물고기, 새, 집, 자동차 등이 매달려 꽃처럼 피어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니다. 작가는 그 가지 위에 꿈을 피워 내고 있는 것이다. 작업실 벽면엔 최근 작업들이 걸려 있다. 술 한잔 거나하게 하고 벌렁 누운 선비의 손엔 휴대전화가 들려 있다. 서울의 가족과 통화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아닐까. 예전에 없던 골프장 풍경과 골프 치는 사람이 화폭의 중심에 자주 등장한다. “골프장에 그림 그려주고 골프채를 하나 얻었어요.” 요즘 그는 작업실 한켠에 연습기를 가져다 놓을 정도로 골프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옛 그림 속 선비와 정자의 자리를 골프 동료와 골프장이 대신하고 시와 술이 있는 풍류는 골프가 대체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 그림은 오늘의 제 생활을 그리는 데 충실하고자 합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판 선비의 문인화가 이런 것일 게다. 화폭의 통통배와 바다는 작가가 ‘그가 살아가는 지금의 제주’라는 현장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엿보게 한다. 그림 기법도 어디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캔버스에 장지를 붙이고 먹과 아크릴로 검정 바탕을 만든다. 그 위에 회백색 등을 덧바른 뒤 형태를 긁어 내고 그 자리에 채색하는 식이다. 굳이 말한다면 일종의 상감기법이라 할 수 있다. 한눈에 모든 풍경을 그려넣는 전통적 부감법은 그의 수평적 생각과 맞닿아 있다. 그가 말하는 중도(中道)의 세계다. 사람중심이 아니라 물고기 새 등도 같은 생명선상에 놓여, 화면에 사람과 동등하게 위치한다. “섞어 버리면 편해져요.” 나누고 집착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란다. 억지로 소재를 찾지도 않는다. 일년 열두 달 피고지는 꽃들을 그저 화면 위에 초대하면 그만이다. 수선화 매화 엉겅퀴꽃 석류꽃 국화꽃 등이 단골 손님들이다. 뒤뜰에 야생 꿩이 날고 온갖 새들이 작업실 곁에 날아든다.작가는 새가 창문에 부딪혀 행여 죽을세라 유리창에 새를 그려 붙였다. 정원에 놀러오는 새들을 위해선 물도 먹고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돌함지와 절구통에 물을 담아 놓았다. 작가의 마음씀씀이가 중도에 이르렀음인가. “모두가 화폭의 초대손님이니 잘 모셔야지요.” 새벽 3시. 작업실에서 테크노풍의 음악에 흘러나온다. 프랑스 술집에서 들을 수 있는 일종의 불교적 명상음악인 붓다바(buddha-bar)다.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잡념을 없애기 위해 듣는다. 정권진의 심청가와 색소폰, 트럼펫 연주 음악도 즐긴다. 하루 평균 10시간의 작업에서 음악은 동반자나 다름없다. 아침식사 시간이 되자 골프 숙적으로 제주에서 조경업을 하는 문희중씨와 토건업을 하는 김용덕씨가 작가를 단골 식당(종가집설렁탕)으로 불러낸다. 끼니를 이곳에서 해결하는 작가를 위해 주인은 전용 룸을 만들었다. 작가는 화답으로 그곳의 커튼에 그림을 그렸다. 둘러앉은 이들은 이젠 가끔씩 만나 예술을 논하는 친구가 됐다. 자주 가는 핀크스 골프장엔 왈종 룸까지 생겼다. ‘포기의 미학’이 작가의 얼굴주름마저 웃음이 되게 하고 있다.
제주=편완식기자/wansik@segye.com <연보> ▲1945년 경기 화성 출생 ▲1970년 중앙대 회화과 졸업▲1983년 미술기자상 수상▲1991년 한국미술작가상 수상▲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등 작품 소장 |
2004.06.28 (월) 1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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