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충남 서산 '서머프집'서 창작...시인.소설가 유용주

바보처럼1 2007. 7. 10. 22:54
 
[전원속의 작가들]충남 서산 '스머프집'서 창작…시인·소설가 유용주
"이젠 상생과 자연을 노래하고파"
 유용주씨가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내 개간한 밭에서 싱그럽게 자라난 채소들을 돌보고 있다.
그를 소설가라고 해야 할지 시인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열네 살 어린 나이부터 중국집 심부름꾼에서 시작해 온갖 험한 노동의 세월을 거쳐 시인으로, 소설가로 거듭난 유용주(44)를 말하는 중이다. 그는 1991년 ‘창작과 비평’에 ‘목수’외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먼저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어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 등 두 권의 시집을 펴내며 신동엽창작기금을 받기도 했다. 2000년 단편소설 ‘고주망태와 푸댓자루’를 ‘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를 겸업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펴냈다. 그는 다시 본격적으로 자신의 험난했던 세월의 노동일기를 일간지에 소설 형식으로 연재한 뒤 장편소설 ‘마린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지난해에는 급기야 ‘느낌표’에 산문집이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라서기도 했다. 그러니 대중에게 널리 각인된 이미지로 말하자면 산문을 쓰는 소설가에게 가까울 터이고, 그가 문학적 순정을 가장 곡진하게 바치고 상대적으로 더 깊은 애정을 쏟는 장르로 말하자면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충남 서산 변두리 동문동 산자락 아래 그의 집은 ‘스머프 집’이라 부른다고 했다. 과연 서양식 주택처럼 담장은 없고 자귀나무 연분홍 꽃 그늘 아래 아담한 집 한 채만 서 있다. 유용주의 큰 덩치에 비하면 아담한 난쟁이 스머프의 집은 어울리지 않는데, 정작 집안에 들어서면 그만의 아늑한 공간이 펼쳐진다.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고, 그는 집에서 ‘전업주부’의 일들을 해내며 글을 쓴다. 그는 아내가 출근하면서 “손님 온다고 모처럼 깨끗하게 집안 청소했다”고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을 하고 나갔다며 웃는다. 아내의 첫 발령지가 서산이었던 까닭에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14년 전에 내려와 정착했다. 단칸 셋방에서 시작해 임대아파트와 사택을 거쳐 부춘산 아래 스머프 집에는 3년 전에 입주했다. 그가 간단히 집안 구경을 시킨 뒤 텃밭으로 일행을 안내한다. 텃밭에는 치커리, 상추, 고추 등속의 채소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된 고랑에서 한껏 싱싱하게 자라나는 중이다.

“초봄 내내 아카시아나무를 도끼로 찍어내고 잡풀을 제거해서 일군 밭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끙끙대는 나를 보고 부질없는 짓을 한다는 표정으로 웃고들 지나가더군요.”

그는 자랑스럽게 노동의 결실을 소중하게 손으로 만져가며 맞춤하게 비껴드는 석양 아래 환하게 웃는다. 그에게 노동은 지겨운 가난을 연상시키는 것이지만 동시에 빼앗고 빼앗기는 대상이 아닌, 인간이라면 마땅히 복무해야 할 신성한 그 무엇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 노동이기도 하지만, 저 깊숙하고 안락한 곳에 퍼져 앉아 자본의 힘으로 노동을 부리는 인간들이 건강해지기 위한 최소한의 처방전도 노동이기 때문이다. 유용주는 순전히 가난 때문에 페달에 발이 채 닿지도 않는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자전거를 끌고 물건을 배달했고 중국집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빵공장에서 무수히 얻어맞으며 다른 이들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금은방에서 보석세공 조수 일을 하며 야학에 다니면서 시에 눈을 떴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용주는 더 이상 이런 일화들로 그의 문학을 설명하는 것이 마뜩지 않다. 그가 살아온 내력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산문집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주부 대상 TV 프로그램을 필두로 수많은 매체에서 출연요청과 인터뷰 섭외가 들어왔고, 심지어 책에 이름만 빌려주면 거액을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결연하게 이를 거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학이 달콤하고 쉬운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산문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내 문학관 때문이 아니라 매스컴이 부풀린 일종의 거품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누구는 ‘느낌표’에 선정되니까 로또라도 맞힌 양 비아냥거리고 심지어 애틋하던 인간관계마저 그 때문에 왜곡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솔직히 그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세를 받은 게 사실이고, 모처럼 주변에 나누어주는 행위가 얼마나 뿌듯하고 좋은지 실감했지요. 하지만 나는 물질이 넘쳐나는 이 사회에서 남과 경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욕망의 끝은 상생이 아니라 죽음이지요. 욕망의 정체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빼앗는 겁니다.”

그는 중학생인 큰딸이 대학에 들어갈 5년 후쯤이면 더 깊숙한 시골로 들어갈 예정이다. 그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 소로의 ‘월든’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기록이 아닌, 주변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을 글 속에 제대로 담아내는 소설 같은 시, 시 같은 소설을 써볼 작정이다. 이 대목에서 그에게 시와 산문이 어떻게 다른지 물었을 것이다.

“산문은 일종의 해원(解寃)의 글쓰기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시는 관념이 아니라 몸이 우선입니다. 일을 할 때, 가슴이 땀이 맺힐 때는, 시가 하루에 12편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으면 산문은 가능할지언정 좀처럼 시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서산에 내려왔을 때 처음부터 그가 집안에 들어앉아 ‘전업주부’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노동으로 단련된 그는 ‘목수’로 서산의 많은 건설현장에 참여했다. 일을 마치고 단칸 셋방이 바라보이는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 캄캄한 밤중 자신의 집에서만 꽃등불 같은 불빛이 비치고, 문앞에 이르러 도마질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행복에 겨워 몸을 떨었다. 가정의 평화와 따스함을 성장기에 제대로 맛보지 못했던 그에게 식솔들이 안온하게 숨을 쉬며 잠들어 있는 모습 자체가 지대한 행복이었던 것이다.

“주로 밤이면 거실에서 글을 쓰는데, 비가 내리는 밤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닫고 여기저기 손보며 비설거지를 할 때 안방에서 잠들어 있는 저 보살들이 나를 남편이라고, 아버지라고 믿고 편안하게 자는구나 싶을 때 지금도 가장 행복합니다.”

참고로, 유용주의 별명은 ‘릴라’였다. 얼굴 골격이 굵고 호방해서 붙여진 고릴라의 준말이다. 최근에는 별칭이 ‘슈렉’으로 바뀌었는데 모처럼 문우들이 내려와 시내에서 술 한잔 마시고 들어가 아내를 향해 뛰어들며 ‘피요나 공주!’라고 불렀더니 재치 넘치는 아내 왈, “뭐? 피가 난다고?”라며 응수해 그는 갈갈갈 웃었다. 하지만 정작 카메라 파인더에 들어온 그의 모습은 릴라도 슈렉도 아닌, 역광으로 비껴드는 석양을 아우라처럼 드리운, 슬픔으로 단련된 깊은 눈빛의 시인이었다.

서산=글·사진 조용호기자/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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