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용인 고기리서 10년째 작업하는 조각가 도흥록

바보처럼1 2007. 7. 11. 05:22
 
[전원속의 작가들]용인 고기리서 10년째 작업하는 조각가도흥록
"청각의 명품을 눈의 명품으로”
악기를 스테인리스로 형상화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는 조각가 도흥록씨.
작가의 작업실 한켠에 바이올린과 비올라, 콘트라베이스, 첼로 등 현악기들이 놓여 있다. 철공소 같은 작업장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귀로 듣는 명품 악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조각가 도흥록(48)은 청각의 명품을 ‘눈의 명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스테인리스로 악기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실제 악기들을 곁에 두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광교산 자락이 감싸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 고기리 작업실에서 10년째 금속들과 씨름하고 있다.

“금속의 물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성질이 더러운 놈들이지요. 툭 치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 찬찬히 달래가며 구슬려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할 거야’ 하면 말을 안듣지요.”

가장 섬세한 악기 형태를 금속으로, 그것도 스테인리스로 만드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다. 강판을 가열하고 두들기며 모양을 잡고 용접까지 해야 하는 일은 그야말로 3D업종이다. 속삭이는 소리를 못 듣는 난청 ‘직업병’에다 용접 불빛에 목 아래가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그가 늘 목을 감싸는 옷을 입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얼마 전 끝난 쾰른아트페어와 화랑미술제에 연이어 참가했음에도 그는 피로한 기색도 없이 작업실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놀겠다는 생각보다 짬짬이 즐기는 편이지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8시간 작업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그는 이를 ‘8시간 근로시간 준수’라고 했다. “작가는 철저히 노동자가 돼야 합니다.”

그는 쾰른아트페어 기간 중에 짬을 내 베를린까지 기차여행을 했다.“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문뜩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꿈’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남보다 욕심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미술은 어쩌면 이미지를 파는 일이다. 이미지를 수단으로 꿈을 이야기하는 셈이다. 작품을 한다는 것은 결국 남과 이야기를 잘하는 것이다. 욕심은 대화의 장애가 될 뿐이다.

“아트페어는 작가에게서 창작력을 인정받는 좋은 기회입니다. 자기만의 기법을 먼저 보여줘 자연스럽게 ‘작품특허’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 방향도 덤으로 알 수 있지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는 쇼킹한 작품을 보는 유쾌함도 그에게는 소득이었다.

작가는 고향집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 액자들과 거울들을 떠올리며 스테인리스판을 도화지 삼아 펀칭 작업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삶의 흔적과 가족사가 무수한 펀칭 자국 속에서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듯하다.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액자 틀을 없애니 무한히 자유로웠다. 생각의 폭도 넓어졌다. 액자에 갇힌 사진 속 주인공이 걸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스테인리스판 그대로가 마음에 쏙 들어왔다. 둥근 스테인리스 작품엔 펀칭으로 징 같은 울림을 파문처럼 새겨 넣었다. 징 소리가 당장이라도 울려퍼질 것만 같다. 작업실 밖 산을 배경으로 작품을 들고 있으니 서산의 둥근달을 닮았다.

“작업은 쥐어짜면 안돼요. 몸의 파장대로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내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바깥을 통해 나를 보는 거지요. 내 안에 있는 것을 내가 물리적으로 나오게 할 순 없습니다.”

왼손으로는 조각을 하고, 오른손으론 그림을 그리는 양손잡이 작가는 원두커피를 즐겨 만들어 마신다. 맛과 향이 강해 담배를 끊는 데 도움이 됐다. 작가는 일본인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무사시노미술대학을 졸업한 아내는 요즘 도자그림 작업에 흠뻑 빠져 있다. 서울대 동양화과 유학 당시 작가를 만났다. 올해로 결혼 15년째다.

“일본 사람들은 타인을 신뢰하는 데 10년은 걸려요. 한결같아야 믿어주지요.”

그가 처가로부터 인정받기까지 그런 시간들이 흘렀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국제결혼이란 어찌 보면 성질이 다른 금속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일과 같다. 금속도 10년은 다뤄야 말을 들어준다지 않던가.

그의 작업실 벽엔 후배들의 작품들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선물 받은 것이냐고 물었다. “저도 작품을 팔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나도 파니까 사야지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그 속에 그의 ‘순리의 철학’이 숨겨져 있다.

“조형언어인 미술은 청각언어인 음악에 비해 접근성이 용이해 서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장점이자 약점이지요.” 그가 귀족적인 명품 악기를 굳이 작품화하려는 의도엔 ‘미술의 명품화’를 이루고 싶어하는 속내가 분명 숨어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실 마당엔 모과나무와 대추나무가 까치밥을 달고 서 있다. 암으로 죽은 그의 대학동기가 생전에 심어준 것이다. 사람은 갔어도 추억이 거기에 매달려 있다. 작가의 스테인리스 작품 속에 그 나무들이 얼굴을 비춘다. 자신들의 사연들을 새기듯이.

글 편완식, 사진 이제원기자/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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