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유승도 시인이 영월 산골짜기서 사는 이유는

바보처럼1 2007. 7. 11. 05:24
 
[전원속의 작가들]유승도 시인이 영월 산골짜기서 사는 이유는
바람은 묻지 않는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서울에서 제천을 거쳐 영월까지, 다시 산과 산 사이를 지나고 고개를 넘어 작은 마을까지, 그 마을을 지나서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힘겹게 올라 산 중턱쯤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옆길로 새어나와 당도한 골짜기 외딴집. 그곳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예밀리에서 시인 유승도(44)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더불어 6년째 살고 있다. 낮에는 산 아래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오고, 저녁이면 다시 산 위에서 내려오는 바람의 길목에 그 집은 서 있다. 시인은 그 골바람 속에 서서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려 하지 않았으므로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고, “골짜기 외딴집 툇마루에 앉아 한 아낙이 부쳐주는 파전과 호박전을 씹으며 산등성이 너머에서 십년 묵언에 들어가 있다는 한 사람을 생각했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침묵’에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 바람 속에 서 있었으므로.

유승도는 세상과의 불화에 유난히 시달린 편이다. 삼청교육대 바람이 불던 1980년대 초반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도심의 길을 가다가 군인들의 검색을 받았다. 왜 검색하는가, 한마디 물었더니 그들은 그를 인근 파출소로 데려가 서너 시간 동안 마구잡이로 구타했다. 간신히 삼청교육대행의 위기를 모면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심의 높은 건물들이 그를 덮치는 것 같았고, 온 세상이 깡패처럼 다가왔는데, 그 중에서도 국가 자체가 가장 잔혹한 깡패라는 생각에 그는 몸을 떨었다. 아예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군에 입대했고, 군대에서는 상관에게 또다시 구타에 시달리다가 어이없게도 상관폭행죄를 거꾸로 뒤집어쓴 채 이등병으로 불명예제대를 했다. 뒤늦게 형님들의 권유로 대학(경기대 국문과)에 들어갔지만 “어둡고 무겁게만 다가왔던 세상에서,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폭력에 휩쓸려 끝없는 곳으로 가고만 있던 그 세상의 한쪽 구석 대학 캠퍼스에서, 술잔을 올리고 내리다”가 졸업을 맞았다.

취직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세상이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 졸업 후 그는 ‘노가다판’에 뛰어들었고, 제주도로 건너가 옥돔잡이 연안어선을 타기도 했으며, 다시 육지로 나와 탄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어딘들 감옥 아닌 곳이 없었다. 결국 그는 무작정 강원도 정선선의 종착역 구절리까지 흘러가 폐광촌 빈 사택에서 창문마다 모두 두꺼운 검은 종이를 붙여놓고 쉼없이 잠을 잤다. 스스로 세상과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며칠이 흘러갔는지도 모르던 어느 날 바깥에서 꿈결처럼 새 소리가 들렸다. 검은 종이를 바른 후 처음으로 창문을 열었지만 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가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인간세계에서 승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듯이/ 새의 세계에서 새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알고 싶다/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저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 승도야”(‘나의 새’ 전문)

세상 수많은 생명과 사물들 사이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름을 서로 나직이 불러주는 위로의 의식, 그 소박하지만 힘든 의식을 거쳐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는 이 시편을 1995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투고했고, 시인의 명함을 얻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첫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도 펴냈다. 대학 후배인 김미숙(38)씨와 결혼도 했다. 아내의 직장이 있는 안양에 신접살림을 차렸다가 아들 현준이 백일을 맞았을 때 영월 산골로 들어왔다.

골짜기를 헤매다 길 위의 한 집에서 어떤 사내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기에 시인 유승도의 집을 물었더니 본인이라고 답했다. 헐렁한 옷차림에 수염을 기른 시인을 따라 마당으로 올라가자 발 아래로 산 능선들이 굽이굽이 흘러간다. 뿌연 가을 오후의 안개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산의 선들이 수묵화 속의 그림이다. 마당에는 패다 만 장작이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고, 시인의 아내가 쪽문을 열고 나와 수줍게 반긴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집들은 보이지 않는다.

“골짜기의 빈집과 인근 밭을 사서 이곳에 정착한 뒤 아내는 한 3년 동안 힘들어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산골 아낙이 돼버렸어요. 외롭겠다고요? 혼자 살 때는 그런 측면이 있었지만 결혼한 뒤로는 오히려 외롭지 않아서 문제지요. 자급자족할 정도의 농사를 지어요. 포도, 두릅, 고추, 배추 등을 키워서 먹고 남으면 팔아서 생활비를 겨우 충당하는 정도지요.”

마루를 지나 높은 문턱을 장애물경기하듯 건너뛰어 시인이 집필실로 활용하는 방으로 들어갔더니 계곡 쪽으로 넓은 유리창이 나 있고, 그 너머 텅 빈 허공 속에 뿌연 석양이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이곳에서 시를 쓰고 책을 읽는다. 그는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를 짓지만, 그것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제대로 농사를 지으려면 6000평 정도는 경작해야 하는데, 그러면 한해 소출이 1500만∼2000만원 정도 생기지만, 그렇게 하려면 너무 바쁘다. 그저 조금 지어서 한 해 살고 생활비 정도 쓸 수 있다면 그다지 미련도 없다.

겨울로 접어드는 요즘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 장작을 패서 나무보일러가 꺼지지 않도록 자주 불을 때는 일밖에 없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책 보고 글 쓰고 저녁 무렵이면 산자락에 방목한 흑염소들 몰고 들어오는 일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다.

그는 최근까지도 자신의 머릿속을 투명하게 비우고 대상을 아무런 자의식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를 써왔다. 하지만 요즘은 그 대상과 대화하면서 ‘나눔의 시’를 써보려고 한다. 아랫마을 사람들과 이주 전반부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마저 삼가고 그저 시와 자신을 응시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올 봄에는 시가 한꺼번에 20∼30편씩 쏟아져 들어왔다.

“평생 이곳에 살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도시로 나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어디에 사느냐가 굳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도시로 나가면 배경이 사람으로 도배되는데 이곳에서는 사람보다 자연이 더 잘 보이는 이점은 있지요.”

짧은 해가 산 아래로 훌쩍 넘어가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데 시인의 나직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부엌에서 오랫동안 도마 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인의 아내가 저녁상을 차려놓고 청한다. 무를 잘게 썰어넣은 맑은 국과 배추를 씻어 쌈장과 같이 내놓은 소박하고 깔끔한 산중의 식탁에 앉았다. 바깥에서는 골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웅웅거리는데, 시인의 단출한 가족은 백열등 불빛 아래 따스한 저녁을 맞고 있었다. 도심을 향해 어두운 마당으로 나설 때 시인과 그의 아내는 모처럼 찾아온 외지의 방문객을 쉽게 보내기가 섭섭한 표정이다. 떠나는 이방인의 마음이 정작 산골의 오붓한 주민보다 더 외롭다. 하지만 어쩌랴, 산 위로 떠오른 달이 ‘시퍼런 밤’을 환하게 밝혀놓고 갈 길을 저리 재촉하는데.

“멀리 산 아래 마을에 불빛 두어 개 차갑게 빛나고 있는데 밤이 왜 이리도 환한 것인가 매서운 눈빛이 마을을 둘러싼 숲 속 나무 사이까지 노리고 있다”(‘시퍼런 밤’에서)

영월=글·사진 조용호기자/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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