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최씨 고집’이 이뤄낸 성과 10여년 전 광동제약 우황청심원의 텔레비전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적지 않다. ‘최씨 고집’ 최수부 회장이 직접 나와 “우황, 사향만큼은 30년째 제가 직접 고릅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던 광고는 광동제약과 그 제품에 대한 신뢰를 한층 두텁게 했다. 최 회장은 요즘도 매주 경기도에 있는 공장을 찾아 약재를 일일이 확인하고, 기준에 덜 차는 것은 트럭으로 반품한다. “의약품 제조업은 생명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제조·관리자가 품질 관리에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한약은 한가지 재료라 하더라도 위치에 따라 효능이 다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제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원리원칙대로 관리하다 보니 ‘최씨 고집’이란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경옥고, 우황청심원, 쌍화탕 등 한방 의약품으로 유명한 광동제약은 비타민C 음료 ‘비타500’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2001년 상반기에 시판된 비타500은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모으며 히트 상품이 됐다. 지난해 10월 절대 깨질 것 같지 않던 박카스의 판매량을 앞질렀고, 한달 7000만병 판매기록도 머지않아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40여년간 한우물을 파며 어려운 길을 걷다 보니 그만큼 기적적인 품목이 탄생한 것 같다”고 말한다. 한방, 제약과의 인연은 제대한 뒤 서울에서 경옥고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시작됐다. 경옥고 가격은 당시 돈 2만환. 웬만한 월급쟁이의 한 달 월급 수준이다 보니 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몇 달 만에 15만환이 넘는 월급을 올리는 고소득자가 됐다. 그는 남들보다 더 일찍 사무실을 나가서 더 늦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영업의 성공 비결은 사후관리에 있었다. “남들은 주문만 받고 앉아서 배달시키고, 반품을 받아요. 하지만 나는 물건을 직접 배달하고 다음날 고객을 찾아가서 제품을 먹었는지 확인해 봤죠. 먹지 않으면 포장을 뜯어서 먹도록 하고, 수시로 들르면서 효과를 보고 있는지 물어보며 정성을 다했어요.” 외판원이었지만 그는 영업만 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직접 공장에 가서 약을 빚고 포장도 하면서 자연스레 경옥고 제조기술에 필요한 것을 습득했다. 그리고 1963년 집 마당에 경옥고 공장을 세우고 광동제약사를 열었다. 회사를 경영하며 겪은 시련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직원의 실수, 음해 등으로 영업허가가 취소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는 그러나 어려운 와중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가짜 경옥고 사건, 쌍화탕 가격을 내리라는 정부의 압력에도 의지대로 밀고 갔다. 제품 품질에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기업가는 돈을 많이 알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광동제약은 84년부터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후원하고 있고, 94년에는 광동한방병원을 열어 무료 진료를 확대하고 있다. “기업가는 고용을 확대하고, 세금 많이 내고, 연구개발비 많이 들여야 합니다. 기업의 이윤은 사회에 환원되어야 하고, 특히 제약기업의 이윤은 건강과 관련된 곳에 환원되어야 합니다.” #시장이 인생 최고의 학교 최수부 회장은 “내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라고 말한다. 최고경영자가 된 후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의 경영대학원을 거쳤고, 순천향대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음에도 자신의 실질적인 학력은 초등학교가 전부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학술적·논리적으로는 떨어지지만 경영 쪽으로는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있다. 최수부 회장에게는 삶이 곧 학교였고, 시장이 곧 교과서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최 회장에게 학교는 인생의 첫 시험대였다. 사업에서 성공한 부모 덕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지만 ‘조센진’ 최수부는 일본 학생들에게 이지메를 당해야 했다. 그는 “벼르고 벼르다 퇴학을 각오하고 상급생 5∼6명을 때려눕혔다”고 회고한다. 그해 광복이 되면서 그의 부모는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건너온다. 한국 학교에서 그는 한국인이 아니라 ‘쪽발이’였다. 그나마 학교생활도 아버지가 1년반 만에 사업에 실패하면서 끝난다. 의욕을 상실하고 몸져 누운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아홉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2세 최수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지게 일을 시작한다. 왕복 40㎞를 걸어서 서까래를 지어다 파는 고된 일을 하다보니, 어느 날 아침에는 밤새 코피가 흘러 방바닥에 엉겨붙은 통에 얼굴이 방바닥에 붙어 움직일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먹지도 못하고 일을 하다 보니 스무살이 넘어도 키가 안 자라 155㎝에 불과했어요. 군대에 가서야 키가 172㎝까지 자랐죠.” 그는 그래도 “어려서 단련된 체력과 끈기는 어느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못한 소중한 재산이 됐다”고 말한다. 입대 전까지 땔나무를 비롯해 담배, 해삼, 찐빵, 엿, 돼지까지 안 팔아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시장에서 4∼5년간 온갖 장사를 거치는 동안 그는 평생의 장사 수완을 익혔다. 그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신용’이었다. 그는“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좀더 잃는 것이고, 신용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누구인가 입지전적인 CEO를 말할 때 최수부 회장은 첫머리에 꼽히곤 한다. 12세에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의 고생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살면서 배운다’란 말처럼 그는 역경을 통해 필요한 것을 배워나갔다. 그의 개인사는 지난해 펴낸 자서전 ‘뚝심경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28세에 창업한 후 40여년 간 정직과 신뢰, 부지런함과 검소함으로 광동제약을 지금의 자리에 올렸다. 바닥부터 시작했기에 설혹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도 좌절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비관하지 않고 건설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한때 70여개에 달하던 한방업체 중 살아남은 유일한 곳이 광동제약”이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현재 광동제약의 사장은 그의 아들 최성원씨가 맡고 있지만, 최 회장은 아직도 회사에 출근하며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 중국, 일본 등 해외시장 개척에도 간여한다. 일흔의 나이임에도 건강을 지키는 비결은 꾸준한 운동. 그는 일주일에 3∼4번 회사 인근의 헬스클럽을 찾아 1시간30분 가량 운동을 한다. |
2005.08.08 (월) 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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