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저수지를 돌고 돌아 어렵사리 소로를 타고 당도한 시인의 집. 지붕은 검고 벽은 하얀, 그림 같은 집 두 채가 물가를 내려다보는 숲 속에 숨어 있다. 마당에 차를 세우자 개들이 어지럽게 짖는다. 가까운 길을 멀게 땡볕 속으로 달려온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시인의 집 서재에 앉았다. 집이 두 채인데, 하나는 살림집이고 또 하나는 소규모 도서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책이 서가에 빼곡이 들어차 손님을 압도하는 집필용 집이다. 시인은 새벽에 일어나 긴 오전 작업을 마친 탓인지 눈이 충혈돼 있다. "장서요? 이사 갈 때마다 버리는데도 1만5000권 정도는 됩니다. 1년에 책값만 600만원이 들어가요. 1년이면 1000권이 늘어납니다. 다 읽느냐구요? 물론이지요. 속독법을 배운 건 아닌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연스럽게 속독의 정수를 알고 있더군요. 머릿속에 이미지맵을 그리면서 읽어나가면 아주 선명하고 빠르게 책의 내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한적한 곳에 몸을 부리고 전원의 한유를 만끽하고 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한 게 잘못이었다. 시인은 도심에서 적당히 술 마시고 사람들과 다투고 엉기고 사랑하는 척하다가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대단히 절제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 3시에 눈을 뜨면 집필실로 건너와 일을 하다가 낮 한두 시가 돼서야 몸을 일으켜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점심을 스스로 만들어 홀로 성찬을 즐긴다. 물론 그 시간 내내 시를 쓰는 건 아니다. 참고로, 그는 하현달을 가슴에 묻어둔 독신이다. 올 한 해 펴낼 책들이 무려 다섯 권이나 준비돼 있다. 점심을 마치고 난 뒤 그는 청룡사 뒤편 서운산으로 간다. 아무도 없는 산을 홀로 오르내린 뒤 안성 읍내로 들어가 공중목욕탕에서 땀을 씻고 냉면 한 그릇 고독하게 넘기고 난 뒤 다시 집으로 온다. 저녁 어스름, 뜨락의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리며 그는 시를 기다린다. 그러나 시는 좀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한달 전에 한 번 다녀가기는 했다. 그 때 시인은 10편 정도를 건졌다. 한숨조차 가벼워지는 밤이 와도 시가 다녀가지 않으면 그는 졸다가 초저녁에 쉬 잠이 든다. "안성에는 닷새마다 장이 선다. 안성 장날에 낡은 운동화 뒤축 구겨 신고 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장구경 하다가 묘목 한 트럭 끌고 나온 장사치에게 목단(牧丹) 한 주를 샀다. 그 목단을 마당귀에 심었더니 꽃을 피웠다. 칠흑같이 어둔 그믐밤이었다. 목단은 검정 구두를 신은 채 우두커니 서서 소쩍새 울음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나는 목단 가지에 피어난 불꽃 같은 당신의 입술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숨도 한결 가벼워지는 밤이다."(미발표 산문집 '풍경'에서) 시인과 함께 저수지로 내려가는 산책로를 걷는다. 길 바닥에 때이른 밤송이들이 툭툭 떨어져 있다. 지난 밤 비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외로움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외로움에 관해 집중적으로 성찰하는 글도 쓰고 있다. 그리하여 외로움은 밥과 같은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 밥으로 혼을 살찌우려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퍼주기만 하다가 결국 굶어 죽는 사람도 있다. 먹어도 살찌지 않고 퍼주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오롯이 껴안고 가야 한다. 안성으로 내려올 때 막 태어난 강아지 '포졸'이 물가에서 올라오는 주인을 반기며 이리저리 뛴다. 포졸이란 놈, 이곳에 내려와 새끼를 무려 20마리나 두어 번에 걸쳐 낳아제꼈다. 참 왕성한 생명력이다. 외로울 틈이 없다. 시인은 물가에 지은 집에 '수졸재'(守拙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낮은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의 집이란 뜻이다. 낮은 자리도,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그곳도, 지킬 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눈 밝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성소(聖所)일 것이다. /조용호기자 jhoy@segye.com
<사진>9년전 여름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안성에 저수지가로 홀연히 떠나버린 장석주 시인. |
2003.08.20 (수) 1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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