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전원속 작가기행]①소설가 한승원 | ||
전남장흥 득량만서 해산토굴 짓고 집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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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씨가 서울살이를 접고 고향 인근으로 내려온 것은 1997년. 그는 오래 전부터 서울을 떠나 살 집자리를 보러 다녔다. 강화도에도 가보았고 태안반도 안흥 부근에도 가보았다. 집자리 둘러보는 일은 주로 아내의 몫이었는데, 그는 정작 '정답은 가슴속에 품어놓고' 그곳은 이래서 싫고 저곳은 또 이래서 적당치 않다고 도리질만 쳤다. 결국 낙점된 곳이 고향 회진포구 인근의 율산마을이었다. 한씨는 평생 바다와 연관된 소설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밀도 있는 바다 소설을 써보고 싶었던 욕구는 한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 소원을 풀기 위해 그는 득량만 앞바다로 오고 말았다. 반드시 바다 가까이로 가고 싶은 열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출판기념회 같은 데 불려가서 '초상집 개'처럼 문단에 이름만 걸어놓고 외롭게 잔칫집을 어슬렁거리는 늙은 문인들을 볼 때면 자신도 그렇게 늙어갈까봐 조바심이 났다. 집을 지어놓고 장남에게 한승원은 "이곳에 나를 묻으러 왔다"고 말했다.
"자기 가두기를 잘 해야 사람이 향기로워집니다. 안에 있으면 바깥이 더 멀리 잘 보여요. 재주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재주를 넘다보면 세상이 잘 안 보이게 마련입니다. 작가의 삶은 대우주적 시각이 형성되면 어디에 있든지 완성되는 것이지요. 최첨단 문명의 한가운데서 휘둘리다 보면 방향감각과 기준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창문 너머로 해무에 뒤덮인 바다가 보이는 토굴의 거실에서 한승원씨는 '가두어 두는 삶'의 향기에 대해 사선으로 비껴드는 햇빛을 받으며 말을 꺼냈다. 젊었을 때 가두어놓고 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젊어서는 욕망이 성찰을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서는 가두어놓기보다는 한유하게 몸과 마음을 보살필 공간이 필수적이다. 한승원씨는 젊은 시절 전남 광주에서 오랫동안 교사생활을 하며 소설을 썼다. 처자식은 물론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해야 하는 고달픈 삶이었다. 그러나 글에 대한 욕망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소설만 쓰고 사는 삶이 너무나 간절해서 밤에 숙직하다가 교사(校舍)가 불에 타버리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소설가로서 명망이 붙고 동생들도 어느 정도 앞가림을 할 무렵, 그는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서울로 솔가해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을 위해' 서울에서 17년간 소설을 쓰며 살았다. 40대 후반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입원을 반복하면서 세번이나 유언장을 작성할 정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을 위한' 소설을 쓰기 위해 낙향했고, 행복한 삶을 향유하고 있다. 그는 이제 독자가 단 한명만 남더라도 죽을 때까지 소설과 살겠다고 말한다.
강원도 평창산 소나무로 지은 한옥의 지붕 빛깔은 '커피색'이다. 내부는 소나무 향기가 아직 그대로 배어나는 토속적인 공간이다. 거실 한 켠에 벽난로가 놓여 있고, 사방 벽은 책으로 가득하다.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1시간 정도 맑은 정신으로 소설을 집필하다가,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산책에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뒤 대략 2시간 정도 다시 집필에 몰두한다. 점심을 먹고 연못에 나가 향초와 수련과 대화를 나누다가 집필실로 들어와 존다. 다시 책을 보다가 저녁 무렵 텔레비전의 '동물의 왕국'은 꼭 시청한다. 밤 9시 뉴스가 시작될 무렵이면 졸음 속에서 보내다 잠이 든다. 밤 한두시에 잠이 깰 때도 있다. 노년의 증상이다. 그 시간이면 한승원은 지네가 기어다니는 소나무 기둥을 올려다 보며 우주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삶이란, 바닷물의 순환처럼, 우주의 순환을 따르는 것이라는 진리가 그 꼭두새벽의 찰나를 향기롭게 만든다. 아무리 우주의 순리를 깨달았다고, 외로운 순간이 없겠는가.
"작가는 여행을 가도 주인공과 함께 가기 때문에 외롭지 않습니다. 나는 내 주인공과 함께 바닷가를 산책합니다. 내 글쓰기라는 것은, 전원에서의 자유자재를 글의 너울 속에 꽃향기 풀향기를 버무려 풀어놓는 일입니다. 내게는 수레바퀴 같은 두 목숨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물학적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적 목숨이지요. 그 둘 가운데 하나가 부서지면 내 수레는 존재의미를 잃게 됩니다. 나는 살아 있는 한 소설을 쓸 것이고 소설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장흥=조용호기자 jhoy@segye.com
2003.07.23 (수) 1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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