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15)주철장 문화재 원광식씨

바보처럼1 2007. 8. 8. 21:14
▶한국의 名人◀ (15) 주철장 문화재 원광식씨
(진천=연합뉴스) 변우열 기자 = 10월 16일 오후 낙산사 보타락에는 지난해 4월 경내를 덮친 대형산불로 녹아 내린 보물 479호 동종(銅鐘)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년6개월여 만에 환생해 중생의 번뇌를 씻어주듯 은은하고 장엄한 소리를 토해내는 종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쓴 채 이 종을 바라보던 한 노인에게 다가가 "훌륭하게 종을 복원했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이 노인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수백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점차 제 소리를 잃어가는 신라, 고려의 범종(梵鐘)을 복원해야 한다는 숙명 같은 과제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노인은 43년간 종에 혼(魂)을 바친, 중요 무형문화재 112호인 주철장 기능보유자 원광식(64)씨다.

   황금 들녘에서 가을걷이가 한창인 10월 하순. 원 씨의 작업장인 충북 진천군 덕산면 합목리 성종사(聖鐘社)를 찾았다.

   7천여평의 부지에 50여t이 넘는 종을 제작할 수 있는 최신 용해설비와 주조시설을 갖춘 성종사의 한 편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원 씨는 낯선 손님을 보자 굳은 살이 박힌 손을 내밀며 "기자분이 뭘 이런 곳까지 찾아오느냐"며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낙산사 동종 복원에 성공하셨는데..."라고 질문을 던지자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종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냈다.

   그의 종 인생은 1963년부터 시작됐다.

   중학교를 마치고 자동차 정비일을 배우기도 했지만 재미를 붙이지 못해 21세가 되던 해 8촌 형 원국진씨가 운영하던 `성종사'라는 종 만드는 작업장에 들어갔다.

   당시 이 곳에서는 주로 교회와 학교 종을 만들고 있었다.

   선배들로부터 매를 맞아가며 배웠던 기술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인 1969년 시련이 찾아왔다.
1천도가 넘는 용광로에서 쇳물이 튀어 한쪽 눈을 잃었다. 그가 지금도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 성종사를 떠나 농사를 짓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나 종과의 인연을 쉽게 끊을 수는 없었다.

   1970년 수덕사가 광복 후 최대 규모의 종 제작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은 원 씨가 범종 제작에 평생을 걸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원 씨는 머리를 깎고 수덕사에 들어가 대웅전이 보이는 한 구석에 주물공장을 세운 뒤 꼬박 3년을 보낸 끝에 '종소리가 30리를 간다'는 수덕사의 종을 완성했다.

   스승인 8촌 형이 사망한 1973년 하산해 성종사를 인수했다. 그의 기술이 알려지면서 제작의뢰가 이어져 현재 국내 사찰에 있는 범종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1985년 광복 40년 기념으로 만든 보신각 종도 그의 작품일 정도로 국내 최고 범종 제작자로서의 명성을 얻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항상 1천여년 전 장인들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언젠가 일본의 절을 방문했을 때 일제가 빼앗아 간 신라 종들을 보물처럼 여기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 일본도 인정하는 1천년 전 장인들을 나는 잊고 지냈던 거지. 그 때 일본에 있는 신라 종들을 실리콘으로 복제해 왔어. 그 뒤 1천300여년 된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를 들어 보니 내 재주가 너무 초라했어. 신라, 고려의 종을 복원하기로 결심하고 80년대 후반부터 연구를 시작했지. 마지막 꿈은 성덕대왕 신종이야"
그러나 신라시대 종을 제작할 때 사용되던 밀랍주조 공법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 국내 어디에도 관련 문헌과 기록이 없었다.

   혹시 중국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중국과 수교가 없는 탓에 홍콩에서 비자를 받아 상하이, 베이징, 항저우 등의 사찰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

   결국 직접 만들어보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는 종을 만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밀랍과 기름을 배합해 만든 초로 종 모형과 문양을 제작, 외부를 흙으로 둘러싸 열을 가해 초를 녹인 뒤 이 흙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1천년 전 종 제작의 비밀을 하나 둘 밝혀 나갔다.

   도가니 속의 열을 고르게 유지하고 불순물의 유입을 막는 방법과 고른 합금을 만들어내는 비법도 찾아냈다.

   그러나 흙 거푸집이 1천200여도의 쇳물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기 일쑤였다.

   "거푸집이 쇳물 온도를 견디면서 내부의 공기가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숨을 쉬는 흙을 찾아내야만 했어. 온갖 흙을 다 구해 만들어 봤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지"
마지막 단계의 비밀인 흙의 성분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숭실대 박물관에서 우연히 동경(銅鏡)을 만든 흙 틀을 보고 '바로 이 거다'라고 생각했어. 신라의 수도인 경주 일대를 샅샅이 뒤져 이 흙 틀과 같은 성분인 활석과 이암(泥岩)을 찾아내 작업에 성공했지. 기적이 일어난 거지. 그리고 일본이 빼앗아 간 신라 종을 제일 먼저 만들었어"
마침내 그는 7-8년간 전통 종 제작법인 밀랍주조 공법에 매달린 끝에 1992년 일본 광덕사에 있는 신라 종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그 뒤 1천여년 전 장인들이 했던 것처럼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해 신라의 상원사종, 선림원종, 청주 운천동 출토 범종과 고려의 내소사종 등 20여개의 종을 재현했다.

   광주 민주의 종, 충북 천년대종, 경북 도민의 종, 조계사종, 해인사종, 싱가포르 복해선원종 등 40여년 동안 7천여개의 종을 제작, 한국 범종의 역사가 된 그는 2000년 '대한민국 명장'의 호칭을 얻었고 이듬 해 중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지나온 시간이 1천년 전 장인의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었어. 남은 인생은 신라, 고려의 종을 복원하는 데 바칠 것"이라며 "성덕대왕 신종 재현의 꿈도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원 씨의 몸에서 식을 줄 모르는 장인의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

   bwy@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6/10/30 10:5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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