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한 디아스포라의 삶과 죽음 | |||||||||
2008 04/01 뉴스메이커 768호 | |||||||||
그녀는 한 어머니와 한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문단 열고 그 날은 첫날이었다 마침표 그녀는 먼 곳으로부터 왔다 마침표 오늘 저녁 식사 때 쉼표 가족들은 물을 것이다 쉼표 따옴표 열고 첫날이 어땠지 물음표 따옴표 닫을 것 적어도 가능한 한 최소한의 말을 하기 위해 쉼표 대답은 이럴 것이다 따옴표 열고 한 가지밖에 없어요 마침표 어떤 사람이 있어요 마침표 멀리서 온 마침표 따옴표 닫고
어머니, 당신은 열여덟 살입니다. 당신은 만주 용정에서 태어났고, 이곳이 지금 당신이 사는 곳입니다. 당신은 중국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한국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가족은 일본의 점령을 피해 이리로 이주했습니다. 중국은 광대합니다. 광대함 그 자체보다도 더 광대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땅덩어리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당신은 늘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광대하고 말없는. 당신은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에 삽니다. 당신과 같은, 피난민들, 이민자들, 유배자들, 당신의 나라가 아닌 그 땅에서 멀리 떠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의 나라가 아닌. 그녀는 원초적인 디아스포라였다. 그녀의 부모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피해 만주에서 성장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또 다시 전쟁이 터졌고, 그녀는 피난지인 부산에서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등 정치적 불안과 소요에 큰아들이 휘말리는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다시 미국 이민을 선택했다. 그들은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면서 구한말부터 시작된 긴 유랑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디아스포라였다. 일찍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전혜린이 그랬듯, 모든 에트랑제의 과제는 ‘말’이었다. 속에서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속에서 들끓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트려야 한다. 배설해야 한다. 그녀는 말하려는 고통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녀가 1961년 하와이로 이주했을 때, 그녀의 나이 만 열 살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녀가 영어를 알 리 없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얼마 동안 유아학교(pre-school)를 다녀야 했다. 열 살의 예민하고 영민한 소녀는 세 살, 네 살짜리 어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모보다 먼저 낯선 곳으로 떠난 소녀가 홀로 겪어야 했던 이주의 경험은 단연코 그녀의 정체성에 많은 시련을 주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그녀가 부딪혔을 언어의 장벽은 그녀에게 깊은 고통과 함께 언어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념을 심어주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영어를 배운 지 2년 만에 시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영문 시로 1등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오히려 불어에 더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불어의 예술성, 불어와 한국어의 상통성도 작용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영어와 한국어를 떠난 제3의 언어가 제시하는 매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영원한 디아스포라였다. 1979년, 그녀는 17년 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귀환에 대한 동경과 기대를 ‘망명자’란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 여행은 기억들로 가득 찬 마음에 사무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귀환의 기쁨은 그녀의 동족들로부터 받았던 냉담한 환영으로 인해 줄어들었다. 그들에게 그녀는 단지 외국인일 뿐이었다. 1980년 남동생 차학신이 촬영을 맡은 필름 ‘몽고에서 온 하얀 먼지’의 작업을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 남한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그녀와 동생은 그들을 북한의 스파이로 의심했던 관리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뉴욕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서히 파국이 다가왔다. 그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고는 놀랍도록 섬뜩하고 선연하다. 당신은 죽은 듯하게 보이는 가지 위에도 목련꽃이 하얗게 핀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지가 잘린 채로 남아 있는다. 당신은 회중들로부터 떨어져 있는다. 1982년 5월, 그녀는 버클리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미국인 사진작가 리처드 반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짧게 끝이 났다. 그해 11월 5일, 그녀는 이미 사이가 벌어져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그가 일하고 있던 뉴욕 맨해튼 남쪽의 파크 퍼크(park puck) 빌딩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실종되었다.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그 빌딩의 경비원이 체포되었다. 그는 여성 강간 전력을 지닌 자였다. 그러나 탐지견까지 동원해 건물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정적 물증인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들의 꿈속으로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녀가 자신을 찾는 꿈을 꾸었고, 막내동생은 전등불이 점멸하면서 일정한 숫자를 세 번씩이나 비춰주는 꿈을 꾸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가족들은 지하 수납공간에서 시신을 찾아냈다. 시신 곁에는 그녀가 작품용으로 만든 장갑 조각과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핏자국이 선명한 그 장갑에는 금방이라도 그녀의 손이 들어가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장례식 날, 그녀가 죽기 3일 전에 발간된 ‘딕테’의 초판이 배달되어왔다. 죽은 낱말들. 죽은 언어.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시간의 기억 속에 묻혀버림. 고용되지 않았다. 발설되지 않았다. 역사. 과거. 말하는 여자, 9일 낮과 9일 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찾아내도록 하라. 기억을 회생시키라. 말하는 여자, 딸로 하여금 땅 밑으로부터 나타날 때마다 샘을 회생시키도록 하라. 잉크는 마르기 전에, 쓰기를 전혀 마치기도 전에 가장 진하게 흐른다.
지난 3월, 그녀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가는 데 단초를 제공했던 큰오빠 차학성(63)씨가 한국을 방문했다. 번역 작가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한국 팬클럽의 초청으로 번역 작품을 협의하기 위해 매년 한두 차례 모국을 찾는다. 몇 해 전 도산 안창호 관련 영문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그는 오는 8월 도산 탄생 130주년, 서거 70주년과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일에도 관여하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두 차례 열리는 행사는 학술세미나와 음악회로 이루어지며, 타이틀은 ‘DOSAN-BRIDGING THE PACIFIC(도산, 태평양에 다리를 놓다)’이다. 그것은 생전에 그녀가 성 테레사, 잔 다르크와 함께 유난히 유관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디아스포라의 가슴에도 뿌리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일까. <글·사진 유성문<편집위원> rotack@lycos.co.kr>
참고 및 인용 - ‘딕테’(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어문각, 2004) - ‘관객의 꿈’(콘스탄스 M. 르발렌 엮음, 김현주 옮김, 눈빛,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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