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현송(玄松) 신동철의 한국화 길에서 길을 묻다 | ||||||||||
2008 05/06 뉴스메이커 773호 | ||||||||||
신동철의 그림에는 어머니와 고향이 들어 있다. 은유의 끝에는 늘 어머니와 고향이 있다. 어머니와 고향, 이는 진부한 듯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는 영원한 주제다. 그는 어머니와 고향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눈물나게, 때로는 천연덕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살아서 꿈틀대는 거목의 웅혼한 자태를 담아냈어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겹다. -김택근 ‘신동철의 작품세계’ 중에서 태어난 고향의 달빛이 각기 다른 까닭에, 사람의 생김새만큼이나 각양각색인 것이 소나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나무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어왔으며, 되는 법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싱겁게 살아가던 차에, 아차! 현송이 그린 소나무를 보고 말았다. 말하고, 웃고, 떠들거나, 침묵하는 소나무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아니, 소나무로 만들어진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소나무 위에 하얀 달덩이 하나를 띄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감전당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 아니다. 미안하게도 그를 길러준 고향과 어머니의 책임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들 속에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최영심 ‘사람으로 된 소나무’ 중에서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갤러리에서 열린 현송 신동철(49)의 열네 번째 개인전(4월 16~29일). 어김없이 지기들이 찾아들었다. 김영란. 도서관 사서 일을 하면서 가끔 도보여행을 감행하기도 하는 이 친구는 그에게 자연의 소리를 들려준다. 윤상모. 이 친구는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다. 뒤늦게 음반을 내는 바람에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진짜 노래를 들려주기도 한다. 난데없는 부상으로 깁스를 푼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미 술판의 전주상은 받아놓은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유기고가인 최영심이 달려오고, 사진작가 최공철까지 합류한다. 그야말로 예술의 장르를 망라한 버라이어티 주연이 벌어진다.
이들은 모두 현송의 그림에서 그 흔한 소나무 같은 존재다. 어떤 것은 단단하고 어떤 것은 부드럽다. 어떤 것은 의연하고 어떤 것은 끈질기다. 아니, 하나같이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담고 있다. 가끔은 얽히어들고 가끔은 외따로면서 서로 기대고 서로 북돋아준다. 이것이 거친 박토에서도 소나무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들은 현송에게 고향이고 어머니다. 검은 먹빛으로 번져가는 눈물이고 따사로운 채색으로 돋아나는 웃음이다. 그림이다. 현송의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도다. 완도에 속해 있으면서도 강진 마량이 지척인 이 섬은 얼마 전 새 길을 내었다. 그동안의 바닷길이 아니라 뭍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연륙교가 마량까지 놓인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해남까지 연륙교가 놓이면서 뭍이나 다름없어진 완도 본섬을 시작으로 완도-신지도에 이어 신지도-고금도까지 연결되면, 약산도를 옆에 달고 마량까지 강진만을 빙 둘러쌀 태세다. 새 길은 섬의 숨통을 틔워줄 것인가, 아니면 뭍의 세태에 물들게 하고야 말 것인가.
마을 이장 일을 맡아보기도 했던 현송의 선친은 김 양식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유별나게도 남다른 그림 솜씨를 드러냈다. 선친의 연필 스케치는 어린 현송의 눈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섬 살림에 그림 솜씨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현송은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그 애틋함에 마음이 시리다. 게다가 선친은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떴다. 대신 ‘빚손님’이 찾아들었다. ‘애먼’ 어머니가 여섯 남매를 붙안고 머리행상으로 세상 풍상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열셋,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현송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예식장과 사진관을 겸하여 운영하던 작은아버지 밑에서 사진을 배웠다. 시골에서 예식장에다 사진관이라면 가히 유지급인 것도 그랬지만, 남들은 감히 만져보기조차 어려웠던 사진기를 메고 다니면서 으스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모든 것은 달라졌다. 그는 어머니를 도와 먹고살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쟁기질을 해야만 했다. 해태나 김 양식에다 석화까지 따러 다녔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창이 온통 ‘농사하고 같이 산’ 시절이었다. 그러면서도 1등을 도맡아하던 미술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낮에는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밤이면 사진관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끝내 학업을 다 마치지는 못했다. 현송은 군에 입대했고, 공수부대에 복무하면서 전국진중창작대회에서 1등상을 타기도 했다. 제대 후 개인 화실을 열었지만 여관방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 3000원, 5000원짜리 그림도 그렸다. 갓 결혼한 아내조차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문방구를 냈다가 빚만 잔뜩 지고 반봇짐을 쌌다가 나중에 그림으로 갚은 일도 있었다. 그래도 줄곧 이영찬, 정하경, 김동수 같은 선배 화가들을 따라다니며 곁눈공부를 계속했다. 그림, 그림만이 그의 삶의 이유였고 삶의 목적이었다. 삶의 전부였다.
그곳에서 중국화의 대가 가우복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스승은 그에게 ‘진실하게 자연을 대하라’고 가르쳤다. 스승은 여러 모로 부족하기만 한 제자를 변함없이 믿고 아껴줬다. 스승은 그에게 대학원까지 마치기를 권유했지만,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스승은 아쉬운 듯 졸업전을 겸한 첫 개인전을 앞두고, 유학생에게는 최초로 ‘신동철화전’이라는 친필 휘호를 써주었다. 1996년에 중국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당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먹을 한껏 눌러쓴 그의 그림이 한국적 특성을 잘 드러낸다는 평도 받았다. 전시장을 찾은 스승은 ‘고생했다’며 그의 등을 한번 툭 쳐주고 갔다. 이어 한국으로 돌아와 덕원미술관에서 연 국내 첫 전시회 역시 좋은 호응을 얻었다. 그때 그림이 다 팔려 처음으로 셋방살이를 면할 수 있었다.
현송은 6년 전 갑작스레 아홉 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막내를 낳다 식물인간이 된 형수를 바라지하던 형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후 곧이어 형수마저 세상을 등지면서 조카 넷을 졸지에 떠맡게 된 것이었다. 먼저 세상을 뜬 형은 어느 날 무당의 입을 빌려 그를 찾아왔다. “너 고생 안 시키려고 내가 형수 데리고 간다.” 현송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남은 조카들이라도 제대로 건사키로 했다. 자신의 자식 둘에 새 자식 넷, 연로한 어머니와 아내까지 모두 아홉 식구, 그는 어렵지만 힘겨워하지는 않는다. 왜 안 힘들겠는가. 그러나 그는 늘 혼자 앓고 혼자 아파하다 다시 특유의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돌아온다. 그는 오히려 뒤늦게 자식 넷을 얻은 기쁨을 누리며 산다. 그는 그의 등걸로 그렇게 삶의 무게 하나를 더 받아들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현송은 스케치를 나갈 때 사진기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더 그곳에 다시 가보기 위해서다. 갈 때마다 그곳의 모습은 다르다. 봄에는 봄의 향기가 있고, 여름에는 여름의 활력이 있고, 가을이나 겨울에도 다 나름의 정취가 있다. 그는 거짓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는다. 그가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것도 그것이 살아온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이 일필휘지에 천의무봉이 아니라 한들 어떻겠는가. 그의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지 않고 한번 쓱 훑어본들 또 어떻겠는가. 눈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그린다고 하지 않던가. 그 그림 안에 본연의 눈과 마음이 담겨 있다면, 한눈으로도 이미 족할 일이다. 그것이 바로 그림의 본연이다. 현송은 이제 다시 새벽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농부가 제일 먼저 일을 나간다는 심정으로 새벽길을 달려갈 작정이다. 그 새벽녘의 어스름 속에 잿빛이기도 하고 황톳빛이기도 한 삶의 기억들을 담아낼 것이다. 눈 어두운 어머니가 쑥인 줄 알고 국화잎으로 부쳐낸 쑥전병의 씁쓸함까지도 다 담아낼 것이다. 그 빛들이, 그 기억들이 다 가뭇없이 사라지기 전에. 현송이 길에서 묻는다. 여지껏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이었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또 어떤 길인가. 그 답은 결국 길 위에 있다.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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