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노숙자에서 벤처기업가로, ‘더웨이’ 김해일 | |||||||
2008 05/27 뉴스메이커 776호 | |||||||
길 위의 날들
해일씨가 간만에 서울에 왔다. 외국 바이어도 만나고, 신제품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거래선과 상담을 겸해서다. 전국의 약국에 부외품을 대는 한 총판에서 기존의 ‘라이트그립’과 새로 출시된 ‘위드펜’에 대해 판매 의사를 타진해왔다. 어쩌면 ‘글씨보정기구’라는 자신의 제품을 새롭게 인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늦봄 오후의 햇살이 제법 따갑다. 묵직한 가방을 든 그의 한쪽 어깨가 자꾸만 밑으로 처진다. 서울의 거리는 그의 기억 속에서 항시 낯설다. 해일씨는 거리의 한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섰다.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가방 속에서 치아 모형과 칫솔 하나를 꺼내들었다. 최근 그는 기능성 칫솔의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가방 속에 항상 치아 모형과 칫솔을 넣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틈나는 대로 치아 모형에 칫솔질을 해보곤 한다. 제품개발전문회사 (주)더웨이 김해일(41) 대표의 고향은 현재 그의 회사가 위치하고 있는 대구다. 아버지는 원래 전주 사람이고, 어머니는 서울, 형은 충북 청원이 고향이다. 가족들의 적이 이처럼 모두 제각각인 것은 순전히 부모의 전력 탓이다. 그의 부모는 유랑극단의 배우였다. 아버지는 익살스러운 역을 자주 맡았고 어머니는 악역이 단골이었다. 어머니의 악역이 어찌나 실감났던지 관객들에게 돌을 맞는 일도 다반사였다. 해일씨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극단의 가설 무대가 서면 그는 형과 함께 관객들이 앉을 돗자리를 까는 일을 도맡아했다.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그의 부모는 대구에 자취방을 하나 얻어주고 형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부모가 다시 유랑공연을 떠나면 남아 있는 아이들은 스스로 집안 살림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 김밥을 싸가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친 해일씨는 대구에 있는 한 전문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당시 대학에는 교련 수업이 있었다. 젊음의 반항심 때문이었을까. 해일씨는 군사교육을 거부하다 강제 입영됐다. 어릴 적부터 예능적 끼를 타고난 그는 군 예능부대인 문선대에 들어갔다. 부모를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운 피아노 솜씨가 도움이 되었고, 그는 문선대 고참에게서 재즈피아노를 제대로 익힐 수 있었다. 전역 후 복학을 준비하면서 한동안 재즈피아노 강사를 했던 것도 모두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공부보다 먹고사는 것이 더 급했던 해일씨는 끝내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화려한 시절’도 잠시, 업소 운영의 생리에 어두웠던 해일씨는 투자자들이 이익금을 야금야금 빼내가는 것을 몰랐고,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가 거듭되면서 마침내 빚에 몰리게 되었다. 카드를 돌려 막고 사채로 급한 불을 껐다. 그러다가 급기야 회사의 공금에까지 손을 댔다. 빚은 2억 원으로 불어났고, 투자자들의 원금 때문에 맘대로 업소를 처분할 수도 없었던 그는 끝내 빈손으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금횡령에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게다가 숨어다니면서 향토예비군법 위반이 추가되는 등 길고 긴 수배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중에 남은 돈 몇십만 원을 들고 서울로 갔지만 막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며 노숙자로 지내다가 채 1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하지만 대구 역시 검문을 피해 그가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곤 1년간 몸담았던 학교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강당이나 벤치, 동아리방 등에서 잠을 자면서 끼니는 후배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처음엔 흔쾌히 밥을 사주던 후배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그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 한 끼라도 먹는 날이면 행복할 정도의 힘든 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어느 날 해일씨는 우연히 학교 뒷산을 오르다 혼자 노래 연습을 하는 예쁜 여학생을 보았다. 그녀는 성악과에 다니는 5년 후배였다. 한눈에 반한 그는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 채 어떻게든 그 여학생에게 접근하기 위해 4시간이 넘게 끙끙거리며 노래 한 곡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노래로 함께 강변가요제에 나가자고 꼬드겼다. 어찌된 심산인지 그 여학생은 생각보다 선선히 응낙했고, 둘은 서울 본심에 나갔다가 보기 좋게 예선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와 만남만은 계속되었었고, 그녀와 만나는 동안 그는 하루에 한 끼라도 그녀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기에 이래저래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동거를 시작했고, 아이가 생겼다. 알고 보니 그녀의 가족사는 그보다 훨씬 지독했다.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툭 하면 술을 먹고 들어와 27년 연하의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해댔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나와 숨어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났지만 ‘총알을 피하려다 대포를 만난 격’이었다. 그 남자는 정강이에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폭력의 정도는 아버지보다 더 심했고, 어머니로는 부족했는지 그 딸과 심지어 해일씨에게까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한번은 아기를 업고 있는 아내 옆에서 칼로 툭툭 머리를 치면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참지 못한 해일씨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죽자 사자 싸웠던 적도 있다. 해일씨는 학교 매점을 하던 아는 형의 도움으로 15만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살림을 차리면서 노숙자 생활을 청산했지만 여전히 수배자의 신분이었다. 맏아들이 태어난 지 2년 만에 둘째 딸이 태어났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막노동도 했고 업소에 주류를 대주는 소위 ‘꽈대기’ 일도 했다. 고령에서 남의 목장 일을 하고 있던 친척에게 빌붙어 ‘머슴살이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다. 지관공장에서 일할 때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며 담뱃값 100원으로 하루를 나기도 했다. 당시 없는 사람들이 즐겨 찾던 ‘솔’ 담배가 200원 하던 때였다. 사는 게 너무 퍽퍽해 술 한잔 걸친 채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다가 넘어져 얼굴도 다 까먹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전거마저 없어져 넋을 놓고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그야말로 ‘인생이 자체가 뒤죽박죽’인 시절이었다. 어떡하다 소재가 알려져 집으로 빚쟁이들이 쳐들어오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차압 딱지가 붙는 꼴도 겪었다. 값나갈 살림도 없는 집에서 중고로 산 고작 2만 원짜리 서랍장에까지 딱지가 붙는 모습을 보면서 “다 가져가라! 내 인생까지도 다 가져가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정말 강도짓까지 해보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그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커피자판기부터 여행사, 홈페이지 제작회사 등 영업사원으로 나섰다. 홈페이지 제작회사에 근무할 때는 인터넷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출근 며칠 만에 큰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대구 시내 건물이란 건물, 사무실이란 사무실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다. 빚도 조금씩 갚아나갔다. 은행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듣고는 ‘딱하다’며 빚의 일부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게다가 ‘빚을 어떤 식으로 갚아나가’라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는 수배생활 7년 만에 자수를 했다. 첫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1억 원 정도의 빚을 갚아서였는지 불구속으로 처벌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10월 모든 빚을 청산했다. 비록 1년 만에 문을 닫기는 했지만 2002년 홈페이지 대행회사를 직접 차린 일은 그로 하여금 새삼 사업에 대한 의지를 갖게 했다. 그는 2003년 ‘글씨보정기구사업’을 시작했다. 1년 전 ‘운전자의 흡연 편의를 위해 차량변속장치에 재떨이를 부착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특허를 신청하면서 겪은 경험이 발단이 되었다. 당시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해일씨는 특허 신청 비용을 아끼기 위해 PC방에 며칠씩 틀어박혀 혼자 특허변리를 공부했다. 그리고 직접 장문의 서류를 되풀이해 작성하면서 볼펜을 쥐고 있는 손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볼펜에 고무줄을 묶어서 사용하다가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성장기의 아이들이 연필을 똑바로 잡지 못해 체형까지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당장 찰흙과 석고 등으로 샘플을 만들어보았다. 펜글씨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친구의 도움이 컸다. 그 샘플을 기초로 경북대학교 공학설계기술원의 도움을 받아 2003년 8월 ‘필그립’ 시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계명대학교 벤처보육사업단의 지원금 5000만 원으로 ‘더웨이’라는 회사도 설립했다. 2004년 초 프랑크푸르트 국제문구박람회에 출품하여 좋은 반응도 얻었다. 완제품은 2004년 8월에 출시되었다. 그때부터 해일씨는 혼자 마트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고 납품도 했다. 문구 코너의 작은 매대에서 시작해 호응이 좋자 단독매대가 생긴 곳도 있었다. 외국에 상품을 독점 공급하려는 곳도 생겼다. 제품을 출시한 후 2분기 만에 5억 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해일씨는 얼마 전 의성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유랑극단의 배우로 세상을 떠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에서 약장수 노릇도 마다 않던 어머니다. 그때 해일씨는 맨 앞에 앉아 어머니에게 미리 받아둔 1000원짜리를 꺼내들고 바람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해일씨가 빚에 쫓기던 시절, 하루는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어머니는 부엌에 쌀 한 포대를 던져놓고 집 밖을 나서려다 아이를 업고 있던 아내를 보고는 말없이 지갑을 열었다. 지갑 안에는 제법 뭉툭한 지폐가 있었건만 어머니는 달랑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아내에게 주고는 해일씨를 향해 “너는 고생 직쌀나게 해봐야 할 놈이다”라고 소리치던 어머니다.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너는 착해서 끝내 잘될 거야”라며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다. ‘더 웨이(The Way)’. 그 길. 인간 김해일이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길.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 ‘라스트라다(길)’에서 유랑곡예사 잠파노와 젤소미나가 걸어갔던 길. 평생을 유랑의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젤소미나의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셨건만…. 해일씨가 걸어가는 아스팔트 위로 문득 뉘엿한 봄볕이 떨어져내렸다.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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