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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비록 천한 상궁이였으나.." 영휘원

바보처럼1 2006. 4. 22. 23:25

영휘원, 숭인원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2동 205번지에 자리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 기념관과는 어깨를 나라히 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소령원, 수길원, 영휘원 등에 사용되는 원이란 표현은 왕실의 무덤을 표현하는 것인데 능은 왕.왕후의 무덤, 원은 왕의 부모.세자.세자비의 무덤,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나타냅니다.

 

홍릉 일대는 원래 조선왕조 왕가 소유 국유림이었습니다.  이 일대는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내려 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야산지대로서 왕가에서 주로 능 터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홍릉과 더불어 천장산 동쪽 끝은 조선조 20대 임금인 경종의 무덤(의릉)이 있는것으로 보아 조선조 때, 특히 구한말에 더욱 명당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구한말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명성황후의 무덤(洪陵)을 이곳에 씀으로써 홍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함께 묻기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현 홍유릉에 이장하였습니다.

 

그 후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이곳에 묻힌 지 10년 후 1905년 고종의 후궁이며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던 순헌귀비 엄씨(1854∼1911) 또한 명성황후의 무덤과 이웃 한 이곳에 묻히었습니다.  영휘원이 바로 순헌귀비 엄씨의 무덤입니다.

 

                                      어느 능 못지 않게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습니다.

                                

엄귀비는 평민출신인 영월 엄(嚴)씨 엄진삼(嚴鎭三)의 딸로서 5세 때 아기나인(內人)으로 대궐에 들어왔습니다. 후에 왕후인 민비의 총애를 받아 민비의 시위상궁으로 발탁되었는데 시위상궁이라 함은 사가로 말하면 몸종이나 다름없는것이였습니다.

 

그런 처지에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고종임금과 동침을 했습니다. 그녀는 인물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또한 임금과 동침을 해서 승은을 입었을 때는 당시 국민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였던 시절 그녀의 나이는 32세였고 고종보다 7살이나 많은 나이입니다.

 

그런 궁녀가 어느날 아침 갑자기 임금님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으니 대궐 안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을것입니다. (그 당시 궁녀가 임금님의 승은을 입게 되면, 다시 말해 임금님과 동침을 하게 되면 그 사실을 대궐 안에 널리 알리기 위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처음에는 궁궐의 사람들이 믿을수가 없다는 반응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김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왕후 민비도 처음엔 엄상궁이 워낙 자신과 가까워서 믿어왔던 사이였고 또한 엄상궁이 늙고 못생겨서 임금님께서 탐을 낼 까닭이 전혀 없다고 믿었기에 자기 가까이에 둔 것인데 상상해본 일조차 없었던 배신행위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민비가 얼마나 분노했던지 직접 매를 치려고 형틀을 차리라고 명령했을 정도입니다.  아마 차라리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였더라면 그녀의 분노가 덜했을지도 모릅니다. 늙고 못생긴 엄상궁을 임금님께서 건드렸다는 것은 민비로서는 배신감은 물론이려니와 자존심마저 크게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왕후 민비의 분노는 고종임금의 철저한 사과와 통사정으로 거두어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종이 왜 나이도 많고 미모도 빼어나지 않은 상궁을 품게된 이유는 본인만이 알고 있겠으나 사랑과 애정은 언제나 이렇듯 느닷없이 찾아오는것이기도 하기에 이해 못할 문제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결과는 그리 좋지는 않았던것 같습니다. 10년동안 최소한 명성황후 생전에는 말입니다.

 

고종은  다시는 엄상궁을 가까이하지 않으리다 하며 사정과 다짐을 했고 결국 민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엄상궁은 그 길로 대궐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고종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난건 아니였습니다. 아마 그 후로도 몰래 서로간에 왕래가 있었을거라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의 시해후 5일만에 엄귀인은 전격적으로 역사에 다시금 등장합니다.  이는 고종과 계속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궁에서 쫓겨난지 10년 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5일만에 엄상궁은 대궐에 다시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폭도들이 대궐에 침입하여 한 나라의 국모인 왕비를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대궐 안에는 공포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고종임금마저도 저들에 의해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엄귀인은 이때 기지를 발휘하여 당시 일본보다는 힘센 나라로 여겨졌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임금을 빼돌렸습니다.  후에 '아관파천'이라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사건은 엄귀인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가마 속에 고종을 태우고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던 사건입니다. 

 

그 당시 국왕이 옮겨갔다는 것은 정부가 옮겨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종은 즉시  친일내각의 수반이었던 김홍집을 제거하고 친일내각이 만든 각종 정책을 폐기시켰습니다.   그로부터 만 1년 동안 고종은 엄귀인과 함께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러시아 공사관에서 정무를 보게 되었고 엄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가 곧 영친왕(英親王)이라 불려졌던 영왕(英王)입니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 궁녀 장씨 소생 의친왕, 엄귀비 소생인 영왕, 그리고 나중에 양비에게서 낳은 덕혜옹주 뿐이었습니다.

순종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후계자인 왕세자를 책봉하게 되었을 때 10살이나 손위가 되는 의친왕을 제치고 엄귀빈의 뜻대로 2살 먹은 어린 영왕이 황태자로 책봉된것으로 보아 엄귀인이 실질적인 궁의 실세였던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셋째아들 영친왕, 고종, 

순종 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고종은 1897년에 '조선'이라는 국호(國號)를 버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고쳤습니다. 참으로 획기적인 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는 500년 가까이 명, 청나라를 대국大國)으로 섬기면서 청나라 황제와는 동격일 수 없다는 사대사상에서 임금을 '황제'라 칭하지 못했고 '왕(王)'이라 부르면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의 '제국(帝國)'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가 국력이 쇠잔하여 바람 앞에 촛불처럼 약해졌으므로 이 기회에 완전한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고자 '대한제국'이라 했던 것입니다.


임금을 황제라 칭하고 왕세자를 황태자로 높여 불렀던 대한제국(1897)이 한일합방(1910)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길 때까지 대한제국 13년은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기틀을 갖추어가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있은 후에 일본은 고종황제를 태왕(太王)으로,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 양위를 받은 순종은 조선왕이라 칭하고 황태자는 영친왕이라는 호칭으로 강등시켰습니다.

 

엄귀비는 그 파란만장한 생에 걸맞게 1911년 어이없이 운명합니다.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조선총독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황실에 볼모로 잡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는데 나라를 빼앗기고 아들마저 저들의 볼모로 잡힌 엄귀비의 고통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엄귀비는 소중한 황태자인 자기 아들이 겪기 힘든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에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광경을 고종과 함께 대궐에서 활동사진(영화)으로 보다가 얼마나 애통했던지 입에 물고 있던 떡에 급체하여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금쪽같은 아들 이전에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자신이 정말 미워했던 일본의 사관학교에서 고생하는 필림을 보면서 어찌 떡이 아니라 물이라도 체하지 않았겠습니까?

 

신도와 어도도 깔끔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엄귀비는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후에 숙명으로 개명함)여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따라서 숙명여자대학교는 조선왕실이 여성들을 교육하기 위한 설립한 최초이자 최후의 학교입니다. 또한 양정의숙(현재 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00만 평의 땅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천한 신분이였지만 고종의 사랑을 받아 황태자를 낳은 엄씨. 다른 상궁 출신들과 달리 왕을 모시고 국가의 운명을 건 도박도 주저하지 않았고 무너져가는 황실의 존엄과 나라의 운명을 일으켜보고자 많은 노력을 했던 당찬 여인이였습니다.

 

엄귀인은 명성황후와 더불어 국가와 사회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것은 비단 남성들만의 책무가 아니였다는걸 일깨워주고 있으며 언제나 교육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조선 여성의 전형적이고 열정적인 교육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5. 10. 30 

 

 

                                              금강안金剛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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