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는 곳곳이 문화유적지 입니다.
사실 5천년을 이곳에 살아왔으니 경기도뿐 아니라 국토 그 자체가 문화유적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수원일대는 역사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곳입니다.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 일원 세마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입니다. 세마대는 본래 석대산, 혹은 향로봉이라고 하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칭하여 왔습니다. 208m의 대머리산, 평범한 산 같지만 수원·오산간을 에워싼 주변평원에 우뚝 선 산입니다. 삼남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요지에 버티고선 지형으로 사방을 관망 통제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삼국시대부터 국방의 보루가 된 곳입니다.
옛부터 서울에서 충청도, 전라도 방면으로 내려가는 교통은 대체로 과천, 수원을 경유해 진위, 평택을 거쳐 남행하게 되었는데, 수원 아래 병점에서 다시 갈라져 괴대(槐臺 : 양성)와 아산방면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독산성과 융건릉의 주산인 화산(花山)의 중간사이로 나아 있음을 고지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독산성이 그 당시의 1번 국도인 교통의 요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들입니다.
이 향로봉 산꼭대기를 둘러쌓인 독산성은 옛 기록에 의하면 백제때 처음 쌓아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이후까지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성의 둘레는 3천 6백m쯤 되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 돌을 쌓은 곳은 400m쯤 되고 성벽은 비교적 온전하며 높이는 2~4m입니다. 문터는 동,서,남,북, 암문 5곳이 있었고 복원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성벽 안족에는 보적사라는 조그마한 암자도 있습니다.
독산성에서 서북쪽으로 4km가량 떨어진 화산에는 융건릉이 있으며, 성황산 아래 자리잡은 용주사가 내려다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읍지인 서울을 수호하는 외곽진지로서 남한산성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던곳입니다.
성 전체를 한바퀴 빙돌아도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아담한 성입니다.
독산성이 현재 유명해진 건 임진왜란시 권율장군의 독산성전투 때문입니다.
모든 분이 알고 계시듯이 권율장군은 행주대첩의 승리를 통해 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육상전투의 큰 획을 그었습니다. 권율장군이 한양 바로 코앞인 행주산성으로 오기 직전에 벌인 전투가 독산성 전투입니다. 만약 독산성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행주대첩도 있을수 없었을것입니다. 독산성 전투는 모든 수십배의 적과 싸우는 수성전이 그러하듯이 이기거나 전멸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밖에 없는 배수진의 전투였습니다.
당시 전투의 상황을 말씀드리면 조선 선조의 요청에 의해 파병된 명나라 군사는 남하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권율 장군은 전라도 각 지방의 관군을 규합, 명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한양 탈환을 도모하고자 군사를 이끌고 순변사의 본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로 향하고 있던중이였습니다.
하지만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남으로 내려오던 명나라 군사는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는 다시 후퇴하고 말았고 한양에서 불과 백여 리 떨어진 수원(독산성)에서 이 소식을 들은 권율 장군은 땅을 치며 탄식하였으나, 그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만으로는 도저히 한양을 탈환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양으로 쳐 올라갈 것을 단념하고 독산성에 군사를 임시로 주둔시키고는 게릴라 전술로 치고 빠지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권율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독산성에 웅거하면서 왜군을 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들은 큰 위협을 느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쪽에서 한양으로 올 때 수원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한양의 문턱이었기에 만약에 권율 장군이 수원을 되찾는다면 남쪽으로부터 오는 왜병들의 보급선이 끊겨 버려 아주 곤란한 상황을 맞이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덩그러니 매점 하나뿐인 주차장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10분정도 올라가면 제일 먼저 북문을 만날수 있습니다.
당시 권율을 치기 위해 선발된 왜장이 바로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었습니다. 독산성은 지금은 나무도 제법 많이 있지만 당시에는 나무 한 그루 찾아 볼 수 없는 산세로, 험한 바위뿐이었기 때문에 밑에서 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재래식 무기인 칼, 창 그리고 활만 가지고 지세를 충분히 이용해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 2만명들을 맞아 잘 싸웠습니다. 원래 지세를 이용하여 결사항전을 벌일 경우 군세가 10배가 되어도 점령이 쉽지 않은 법입니다.
왜적의 전상자만 속출하게 되자 왜장인 가등청정은 일단 공격을 유보하고 이렇게 명령했다. “저 산성의 지세가 사방이 바위뿐이니, 분명히 물이 없을 것이다. 군사를 뒤로 물리고 조선군의 물과 양식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 며칠만 포위하고 있으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는 부하 하나를 시켜 물동이 하나를 산성위로 올려보내며 물이 없기에 시간끌기 할 필요없다는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보고를 받은 권율 장군은 “염려할 것 없다. 나에게 계책이 있으니 왜적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말과 쌀을 대령시켜라”고 했고 그런 다음 말을 그 곳에 매어놓고는 말등에 쌀을 끼얹게 했습니다. 멀리서보면 마치 말에게 목욕을 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입니다. 허장성세의 계책인것이지요..
보급과 비밀 군사활동을 위해 만든 암문. 조선시대 성곽에는 거의 암문이 있습니다.
북문과 보적사 가는 길목에 수풀로 덮여있어 무심코 지나치기 쉽습니다.
군사를 멀리 후퇴시키고 성을 포위하여 조선군의 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왜장 가등청정은 이 모습을 보고 말을 목욕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결국 군사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습니다. 왜군이 퇴각하는 기미를 보이자 권율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왜병 3천명을 죽이고 크게 이겼으며 그 여세를 몰아 행주산성으로 이동하여 행주대첩의 승리를 일구어 낸것입니다.
권율장군의 승전 이후 왜군이 물러가자 1594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나흘만에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무너진곳을 수리하며 다시 성을 쌓았습니다. 1595년에는 포루 시설이 갖추어졌고 1597년에는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 안에 집을 지어 주위를 채우고 성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창을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이 성은 중요성이 강조되어 1602년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개축했으며. 그후 정조 20년(1796)에 수원성의 전초 기지로서 다시 이 성을 개축하였습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세마대를 철폐하고 성내거주 주민을 분산,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광복이후 1957년 자유당정권 시절 지방민을 중심으로 「세마대 중건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해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여 옛터에 세마대를 복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세마대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기 준비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을 올곳게 세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극복해야할 대상과 현시기 상황을 꿰뚤어 보고 실천적 대안을 만드는 지혜 또한 중요한 요소란점을 깨달았습니다.
세마대는 자기의 생각을 험악한 날씨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관념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당장의 어려움을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현명하고 유연한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우리의 오늘이 내일의 역사라 했을때 역사를 만들어 가는길은 결코 선언과 결심만으로 되는건 아닐것입니다.
현시기 나라 걱정에 잠 못이루는 많은 분들에게 지혜가 가득차길 기대합니다.
2005.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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