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와 연화공원
고양시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적지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볼수 있다는 점입니다. 개발에 묻혀 문화유산이 거의 초토화된 서울에 비하면 파주가 지척인 고양시에 살고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깝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자주 보고, 자주 즐겨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약 20여회정도 방문했던 파주의 보광사에 대해 느낌을 나누어 보고 같이 즐길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반구정, 화석정, 자운서원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여유가 된다면 파주 곳곳을 앞으로 약 10회 정도까지 써볼 생각입니다..
파주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누가 나에게 고양, 파주의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를 추천하라고 하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벽제->보광사->소령원->유일레저->광탄->여충사(윤관장군묘)->용미리석불입상->영,공,순릉 까지 차로 달리기만하면 고작 1시간도 밖에 되지 않을 거리지만 아기자기한 역사적, 문화적 숨결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코스입니다.
고양시 벽제동에서 파주 방향으로 500m 정도 들어가면 무슨 관광호텔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길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뒷박고개, 왼쪽으로 가면 혜음령 고개입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혜음령에 도적과 맹수가 들끓어 해마다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할정도로 옛날에는 매우 험한 고개 이었습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도 임두령이 서울로 가다 도적 패를 만나 혼내주는 장면 등 혜음령 얘기가 이따금 등장한다고 하는데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두 고개는 제 개인적으로도 별로 좋은 추억이 없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보병 제 9사단(월남전 참전뿐 아니라 바로 전두환을 배출했고 12.12때 노태우가 광화문에 장갑차 댈 때 사단장 이였던,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하고 훈련 많고 군기 빡세기로 소문난 부대)에서 근무하였기에 허구한 날 이놈의 두 고개를 행군으로 넘어 다녀야 했던 눈물의 고개입니다. 특히 완전 무장하고 얼굴에 숯칠을 한 상태에서 야간 행군하며 고개를 넘어가는데 길가의 식당에서 나는 갈비 냄새와 유일레저의 반짝거리는 조명과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소총에 총알이 없는 게 다행이란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암튼 됫박고개는 지금도 혜음령보다 험합니다. 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서 저희 어머니가 꼭 대관령이나, 추풍령 넘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하셨을 정도 입니다.
됫박고개의 이름의 유래는 세가지설이 있는데 하나는 고봉으로 퍼 놓은 됫박처럼 고개가 가파르기 때문이라는 설이고. 두 번째는 6.25때 중국군이 많이 죽어 고개 아래로 흘러내린 피가 됫박으로 퍼낼 정도였기 때문에 그리 부르게 됐다고도 합니다. 세 번째는 영조와 관련된 설입니다. 영조가 생모 묘에 다닐 때 가마꾼들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고개가 낮아지도록 "더 파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파기 고개'였는데 음이 변해 더팍고개→되팍고개→됫박고개가 되었다는 설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설이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설이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기도 하지만 옛지명에 임금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는 점과 영조 바로 다음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융릉에 참배하러 갈 때 지지대(遲遲臺) 고개에 오르면 그때마다 " 왜 이리 더디 가느냐 “ 고 역정을 냈고 참배를 마치고 이 고개에서 화산릉을 바라보면 못내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워했다고 해서 느릴지(遲)자를 겹쳐써 지지대 고개라는 고개 이름이 만들어 진 역사적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암튼 됫박고개를 넘어 S자 고갯길을 한 7,8분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일주문이 보이고 그 위로 제법 널찍한 무료 주차장이 나옵니다. 일주문에서부터 본당방향으로 약 30M 정도는 왼쪽에 음식점에 주욱 들어서 있는데 이 점이 사실 보광사에 가장 맘에 안 드는 부분입니다.
일주문은 부처님의 도량인 절과 오탁악세의 세상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하는데 중생이 사는 곳을 예토(穢土), 부처님이 계시는곳을 정토(淨土)라고 하는 경계의 표시로 일주문을 지나서는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선 것이기에 일주문 안에는 일체의 상점이 없어야 맞는 것인데 일주문 안에 음식점들이라니...쯔쯔쯔...허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여행과 음식은 떨어질 수 없다고 위안을 삼고 이왕이면 맛있는 집하나 소개 할까 합니다.
사실 젤 유명한 집은 시골 보리밥집이라는 산채비빕밥 전문집이 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젤 마지막 집인 꼭대기 산장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식당 가운데 물을 흐르게 만들어 놓은 노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집의 도토리묵은 정말 예술입니다. 도토리 묵 먹으로 일부러 간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식당 길을 지나 조그마한 개울을 오른쪽에 두고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드디어 신라 진성여왕때 도선 국사가 처음 세웠으며 당시 한강 이북지역의 6대사찰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큰 사찰이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영조가 모후인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하여 원찰로 삼은 영조의 효심이 흐르는 보광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원래 목어는 대웅전 바로 앞의 만세루 추녀에 걸려 있던 것을 만세루를 보수할 때 종각으로 옮겼습니다.
새롭고 이채로운 벽화나 매우 사실적이고 정밀한 목어에서 보듯, 우리 문화사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진경시대의 성군(聖君) 영조의 원찰답게, 보광사 곳곳엔 진경시대 예술정신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멋진 사찰에 최근에 생뚱맞게 커다란 화강석불과 납골당을 세운 건 영 못마땅합니다.
보광사는 또 우리나라 실천불교운동의 중심 사찰입니다. 그래서인지 변혁운동 단체에 매우 호의적이며 장소제공도 많이 합니다.
절 입구 왼쪽 언덕의 '戀友之石'이라고 새긴 비석이 있습니다. '벗을 그리는 돌'이라는 뜻인데 실천불교운동을 함께 전개하다 먼저 입적한 종태 스님을 기리며 종태 스님의 본사인 구례 화엄사의 돌을 가져다 도반들의 마음을 새겨 불기 2540년(서기 1996)에 실천불교 전국승가회에서 세운 비석입니다.
무엇보다도 보광사의 열린 진보성은 사찰 안에 연화공원을 세운점입니다.
연화공원은 비전향장기수들의 묘역입니다.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 비전향 장기수들은 연고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북쪽에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후손도 없기에 돌아가시면 어디 변변히 묏자리 하나 변변히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장기수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과 실천불교전국승가회(아래 승가회)를 비롯해 각계 단체 대표와 회원 60여명이 올해 5월 29일 '戀友之石' 바로 뒤쪽에 조그마한 묘역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운 좋게도 6월 11일 날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하고 깜짝 놀랐고 각 묘비의 글을 읽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애국통일투사 묘역 연화공원이 만들어 지던 날 보광사 주지인 일문 스님이 승가회 쪽을 대표해 "힘들게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이념이 다르다고 초라하게 모셔져 있어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1년에 한 번씩 추모 천도제도 마련하여 추모의 뜻을 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고양시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적지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볼수 있다는 점입니다. 개발에 묻혀 문화유산이 거의 초토화된 서울에 비하면 파주가 지척인 고양시에 살고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깝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자주 보고, 자주 즐겨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약 20여회정도 방문했던 파주의 보광사에 대해 느낌을 나누어 보고 같이 즐길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반구정, 화석정, 자운서원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여유가 된다면 파주 곳곳을 앞으로 약 10회 정도까지 써볼 생각입니다..
파주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누가 나에게 고양, 파주의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를 추천하라고 하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벽제->보광사->소령원->유일레저->광탄->여충사(윤관장군묘)->용미리석불입상->영,공,순릉 까지 차로 달리기만하면 고작 1시간도 밖에 되지 않을 거리지만 아기자기한 역사적, 문화적 숨결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코스입니다.
고양시 벽제동에서 파주 방향으로 500m 정도 들어가면 무슨 관광호텔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길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뒷박고개, 왼쪽으로 가면 혜음령 고개입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혜음령에 도적과 맹수가 들끓어 해마다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할정도로 옛날에는 매우 험한 고개 이었습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도 임두령이 서울로 가다 도적 패를 만나 혼내주는 장면 등 혜음령 얘기가 이따금 등장한다고 하는데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두 고개는 제 개인적으로도 별로 좋은 추억이 없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보병 제 9사단(월남전 참전뿐 아니라 바로 전두환을 배출했고 12.12때 노태우가 광화문에 장갑차 댈 때 사단장 이였던,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하고 훈련 많고 군기 빡세기로 소문난 부대)에서 근무하였기에 허구한 날 이놈의 두 고개를 행군으로 넘어 다녀야 했던 눈물의 고개입니다. 특히 완전 무장하고 얼굴에 숯칠을 한 상태에서 야간 행군하며 고개를 넘어가는데 길가의 식당에서 나는 갈비 냄새와 유일레저의 반짝거리는 조명과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소총에 총알이 없는 게 다행이란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암튼 됫박고개는 지금도 혜음령보다 험합니다. 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서 저희 어머니가 꼭 대관령이나, 추풍령 넘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하셨을 정도 입니다.
됫박고개의 이름의 유래는 세가지설이 있는데 하나는 고봉으로 퍼 놓은 됫박처럼 고개가 가파르기 때문이라는 설이고. 두 번째는 6.25때 중국군이 많이 죽어 고개 아래로 흘러내린 피가 됫박으로 퍼낼 정도였기 때문에 그리 부르게 됐다고도 합니다. 세 번째는 영조와 관련된 설입니다. 영조가 생모 묘에 다닐 때 가마꾼들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고개가 낮아지도록 "더 파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파기 고개'였는데 음이 변해 더팍고개→되팍고개→됫박고개가 되었다는 설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설이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설이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기도 하지만 옛지명에 임금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는 점과 영조 바로 다음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융릉에 참배하러 갈 때 지지대(遲遲臺) 고개에 오르면 그때마다 " 왜 이리 더디 가느냐 “ 고 역정을 냈고 참배를 마치고 이 고개에서 화산릉을 바라보면 못내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워했다고 해서 느릴지(遲)자를 겹쳐써 지지대 고개라는 고개 이름이 만들어 진 역사적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암튼 됫박고개를 넘어 S자 고갯길을 한 7,8분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일주문이 보이고 그 위로 제법 널찍한 무료 주차장이 나옵니다. 일주문에서부터 본당방향으로 약 30M 정도는 왼쪽에 음식점에 주욱 들어서 있는데 이 점이 사실 보광사에 가장 맘에 안 드는 부분입니다.
일주문은 부처님의 도량인 절과 오탁악세의 세상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하는데 중생이 사는 곳을 예토(穢土), 부처님이 계시는곳을 정토(淨土)라고 하는 경계의 표시로 일주문을 지나서는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선 것이기에 일주문 안에는 일체의 상점이 없어야 맞는 것인데 일주문 안에 음식점들이라니...쯔쯔쯔...허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여행과 음식은 떨어질 수 없다고 위안을 삼고 이왕이면 맛있는 집하나 소개 할까 합니다.
사실 젤 유명한 집은 시골 보리밥집이라는 산채비빕밥 전문집이 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젤 마지막 집인 꼭대기 산장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식당 가운데 물을 흐르게 만들어 놓은 노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집의 도토리묵은 정말 예술입니다. 도토리 묵 먹으로 일부러 간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식당 길을 지나 조그마한 개울을 오른쪽에 두고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드디어 신라 진성여왕때 도선 국사가 처음 세웠으며 당시 한강 이북지역의 6대사찰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큰 사찰이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영조가 모후인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하여 원찰로 삼은 영조의 효심이 흐르는 보광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보광사로 들어가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영묘사으로 빠지는 조그마한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를 지나면 왼쪽의 유명한 약수가
있고 바로 오른쪽에 개울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 나옵니다. 이 개울 또한 보광사의 매력중 하나입니다.
물이 맑아 올챙이나 가재도 많고 그리 위험하지도 않아 애들이 물장난 하면 놀기에도 그만입니다. 아이들과 갔을 때는
한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탁족하기에도 그만입니다.
무엇보다도 보광사의 볼거리는 영조가 중창한 대웅전입니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대웅보전이란 영조의 사액이 아직도 걸려 있고 독특한 점은 대웅전의 둘레 벽이 흙이 아니라 나무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곳에 그려진 탱화 또한 우리나라 절 어느 곳에서도 볼수 없는 아주 해학적인 민화풍이란 점입니다. 점박이 개가 투구 같은걸 쓰고 아기보살을 등에 태우고 앙증맞은 표정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정말 예술입니다.
일일히 다 설명하면 지루하니까 꼭 빼먹지 말고 보아야 하는 목어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목어의 유래는 행실이 고약했던 승려가 몹쓸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등에 나무가 솟은 이상한 물고기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불교에서 목어의 유래는 행실이 고약했던 승려가 몹쓸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등에 나무가 솟은 이상한 물고기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나무 때문에 헤엄치기는 고사하고 조금만 물살이 높아도 나무가 흔들려 등에서 피가 솟았습니다.
어느 날 생전의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는데 그런데 등에 나무가 솟은 물고기가 다가와 슬피 울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방탕한 죽은 제자였습니다.
스승은 수륙재를 베풀어 제자의 혼이 자유롭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물고기의 몸을 벗은 제자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등에 난 나무를 베어 저와 같이 생긴 물고기를 만들어 막대로 쳐 주십시오. 물에 사는 물고기가
그 소리를 들으면 해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목어는 경고의 의미입니다. 목탁과 비슷한 거지요.
보광사 목어는 특히 우렁차다고 합니다. 여의주를 물고 커다란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어떤 죄라도 용서치 않겠다는 표정입니다. 처음 단순한 물고기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던 목어가 차츰 용의 형상을 띠게 된 것은 도화 꽃이 피면 황하의 잉어들은 상류의 협곡에 있는 용문을 다투어 통과하는데 그 문을 지나면 용이 된다는 어변성룡(漁變成龍)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보광사 목어는 특히 우렁차다고 합니다. 여의주를 물고 커다란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어떤 죄라도 용서치 않겠다는 표정입니다. 처음 단순한 물고기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던 목어가 차츰 용의 형상을 띠게 된 것은 도화 꽃이 피면 황하의 잉어들은 상류의 협곡에 있는 용문을 다투어 통과하는데 그 문을 지나면 용이 된다는 어변성룡(漁變成龍)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목어는 대웅전 바로 앞의 만세루 추녀에 걸려 있던 것을 만세루를 보수할 때 종각으로 옮겼습니다.
새롭고 이채로운 벽화나 매우 사실적이고 정밀한 목어에서 보듯, 우리 문화사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진경시대의 성군(聖君) 영조의 원찰답게, 보광사 곳곳엔 진경시대 예술정신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멋진 사찰에 최근에 생뚱맞게 커다란 화강석불과 납골당을 세운 건 영 못마땅합니다.
보광사는 또 우리나라 실천불교운동의 중심 사찰입니다. 그래서인지 변혁운동 단체에 매우 호의적이며 장소제공도 많이 합니다.
절 입구 왼쪽 언덕의 '戀友之石'이라고 새긴 비석이 있습니다. '벗을 그리는 돌'이라는 뜻인데 실천불교운동을 함께 전개하다 먼저 입적한 종태 스님을 기리며 종태 스님의 본사인 구례 화엄사의 돌을 가져다 도반들의 마음을 새겨 불기 2540년(서기 1996)에 실천불교 전국승가회에서 세운 비석입니다.
무엇보다도 보광사의 열린 진보성은 사찰 안에 연화공원을 세운점입니다.
연화공원은 비전향장기수들의 묘역입니다.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 비전향 장기수들은 연고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북쪽에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후손도 없기에 돌아가시면 어디 변변히 묏자리 하나 변변히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장기수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과 실천불교전국승가회(아래 승가회)를 비롯해 각계 단체 대표와 회원 60여명이 올해 5월 29일 '戀友之石' 바로 뒤쪽에 조그마한 묘역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운 좋게도 6월 11일 날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하고 깜짝 놀랐고 각 묘비의 글을 읽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애국통일투사 묘역 연화공원이 만들어 지던 날 보광사 주지인 일문 스님이 승가회 쪽을 대표해 "힘들게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이념이 다르다고 초라하게 모셔져 있어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1년에 한 번씩 추모 천도제도 마련하여 추모의 뜻을 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영조의 효심에 대한 이야기는 고양시의 또 다른 천년고찰인 흥국사와 소령원과 수길원 이야기와 정조의 효심과
비교해보는것도 의미가 있는지라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이처럼 보광사는 실천불교의 성지로서, 효심의 상징으로서, 귀중한 문화재로서, 현대인의 휴식의 공간으로서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같이 걸어갈 우리의 소중한 곳입니다. 소중한 곳일수록 더욱 가까이, 자주 접해야 소중함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소중함이 미국과 일본등 강대국들이 대한민국을 업수이 여길 수 없는 저력이라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처럼 보광사는 실천불교의 성지로서, 효심의 상징으로서, 귀중한 문화재로서, 현대인의 휴식의 공간으로서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같이 걸어갈 우리의 소중한 곳입니다. 소중한 곳일수록 더욱 가까이, 자주 접해야 소중함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소중함이 미국과 일본등 강대국들이 대한민국을 업수이 여길 수 없는 저력이라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2005. 06. 26
출처 : 우회전금지
글쓴이 : 시대청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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