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임금 중에서 연산군과 더불어 왕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군(君)으로서 생을 마감하여야 했던 비운의 왕입니다.
광해군의 묘는 일단 찾아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춘천으로 가는 국도 46번을 타고 가다 금곡역 4거리가 나오면 우측으로는 고종황제와 명성왕후의 능인 홍유릉의 간판이 보이면 그 반대로 좌회전해서 길을 타고 약 2km 정도 쭉 올라가다가 광해군의 묘라는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올라가면 양쪽에 소를 키우는 우사가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영락교회 공원묘지가 나오는데 광해군의 묘는 그 공원묘지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광해군은 원래의 휘[諱:이름]는 혼(琿)이며 선조8년(1575) 4월 선조와 공빈 김씨(恭嬪金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생모 공빈 김씨는 광해군 을 낳고 2년 후인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해군의 비극은 어찌 보면 어머니를 일찍 여윈 것부터 예정된 것 일수도 있습니다.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생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왕후도 아닌 빈의 둘째 아들이라는 점은 권력의 부침이 큰 궁중 내에서 자신의 기반이 언제든지 위험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미 잃은 두 형제를 정성스럽게 보살펴 준 어머니가 있었으니 자식을 갖지 못했던 정비(正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였습니다.
광해군의 형제로는 친형 임해군은 성질이 난폭해 군왕의 자질이 없다 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하였고 14명의 선조 아들 중 가장 뛰어난 인품과 학식을 지녔다는 광해군은 평소 친아들처럼 사랑해 주던 의인왕후의 지원에 의해 몽진한 평양에서 1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됩니다. 당시에는 세자나 임금이 되기 전 형식적이나마 명나라의 재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전란중이였기에 명나라의 고명도 얻지 않고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전란 중에서도 세자로서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보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세자로서 보여준 위기관리능력은 예비군왕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궁중과 신하들의 명망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차기 왕으로써 자질과 신망을 확실히 쌓은 광해군은 실질적인 생모의 역할을 해주었던 의인황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게 되어 광해군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 영창대군이 태어난 다음부터 정치적 위기가 시작됩니다. 먼저 명(明)나라로부터 형을 두고 동생을 세운 것에 대한 이유로 세자 책봉의 지연 시켰고 선조의 영창대군에 대한 총애와 미련 때문에 후계자로서의 광해군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비공개 능이지만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8시 방향으로 내려가면 묘의 뒷쪽이 나옵니다.
명나라가 광해군 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광해군의 실리적인 등거리 외교노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명분만 앞세우는 명나라 중심의 외교가 아니라 가까운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통해 실리를 찾고자 했던 외교정책에 대한 불만 이였습니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임진왜란과 명나라의 원병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광해군 으로서 명나라의 조선 정책이 조선의 이익을 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이용하는 것뿐이라는 냉엄한 외교적 교훈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동북아 균형론 이 명나라 입장에서 불만스러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나이 34살 때 갑작스러운 선조의 죽음으로 드디어 왕으로 등극합니다.
왕이 된후 약 15년간의 통치기간동안의 긍정적인 부분은 왜란 및 호란 후의 전후복구사업, 선혜청을 두고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 실시, 양전으로 경작지를 넓혀 재원 확보, 많은 서적의 편찬, 사고(史庫)의 정비, 명,청 교체기의 현명한 실리적 외교 등의 훌륭한 업적으로 인하여 국가 재조(再造)의 군주로 까지 평가 받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 즉 왕족간의 갈등과 골육상잔 그리고 당파간의 정치적 조화 실패, 대북파의 전횡 방치 등 정치적 측면에서 실패도 만만치 않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정책의 성공이 정치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 정치적 갈등의 조정력이 통치력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현 시기 참여정부에서도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가장 큰 실책은 형이었던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反正)의 싹을 키우고 말았습니다. 특히 영창대군을 교동에서 살해할 때, 방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질식해 죽게 함에 이르러서는 실정이 이미 정도를 넘어선 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째 거나 이러한 정치적 실패가 결국 인조반정을 부릅니다.
반정의 소식을 듣고 변장을 한 뒤 궁인 한명과 북쪽 후원 소나무 숲을 지나 궁궐 담장을 넘어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해 있던 광해군은 체포되며, 승자의 편에서 쓰여지는 역사의 기록에 패륜적인 혼군(昏君), 폭군으로 기록됩니다.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광해군은 인조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적에 광해군 을 추대할까 의심하여 충청도 태안에 옮겨두었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로 데리고 왔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에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다가 다음 해인 인조15년(1637) 2월에는 광해군 을 가까운 곳에 놓아두는 것이 불안했던지 제주도로 옮겨놓았습니다.
11시~5시 방향이란 뜻의 해좌사향 묘자리.
명당이 아닌란걸 한눈에 알수 있습니다.
휘장으로 가려진 채 배를 타고 제주도에 내린 후 광해군의 수모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들이 윗방을 차지하고 그를 아래채에서 재워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멸시를 해도 고개를 숙이고 한마디 말도 안 했다 합니다.
결국 귀양살이한 지 19년째 되던 해인 인조19년(1641) 7월1일, 유배지 울타리 안에서 예순일곱의 나이로 가장 촉망받던 세자였고 왕이 된지 15년간 전란을 겪고 피폐된 조선을 수습하며 백성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노력했던 광해군은 처량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 유씨는 먼저 1남을 낳았으나 일찍이 홍역으로 잃은 후, 광해군 이 24세 때인 선조31년(1598)에 2남인 폐 세자 지를 낳았습니다. 유씨는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 이 폐위되자 함께 폐하여져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씨의 소생인 폐 세자 지는 광해군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인조1년(1623)에 세자 빈(嬪) 박씨와 함께 폐위된 후, 강화부의 서문(西門) 쪽에 유배 되었는데, 폐 세자 지가 그 해 유배지 집의 가시울타리 밑으로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의 손에는 은과 쌀밥 그리고 황해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인목대비의 강경한 주장에 따라 26세의 나이에 사사(賜死)되어 양주 수락산에 안장됩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폐 세자가 구멍을 통해 도망할 적에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이를 바라보다가 폐 세자가 잡히는 것을 보고 땅에 떨어졌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하며 폐비 유씨는 이 소식을 듣고 인조1년 목을 매 자결하니 이 때 나이 51세였습니다. 묘는 지금 광해군의 묘와 나란히 안장 되어 있습니다.
왕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부인과 자식, 며느리 까지 한꺼번에 잃은 광해군의 심정이 얼마나 참혹했을지 40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아도 가슴이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광해군의 묘와 유씨의 묘.
깨진 장명등이 더욱 눈을 찌릅니다.
권력의 상처를 잊고 예전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지금처럼 둘이 마음 편하게 영면하시길...
권력투쟁은 언제나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투쟁에는 어느 시대였건, 어느 나라였건 외국의 이익이 도사려 있습니다.
광해군 묘에 들어서면 먼저 씁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홍살문이나 비각은 고사하고 장명등마저 부분적으로 깨져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럽게 합니다. 곡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묘 자체가 일반 사대부 묘만도 못하고 길도 묘 위쪽에서 내려오도록 되어 있고 앞쪽으로는 가파른 언덕이 있으며 남쪽이 아닌 11시와 5시 방향 사이로 있는 초라한 무덤 두개.
이 초라한 무덤 두개를 보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의 쓸쓸함에 다시금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습니다.
궂은 비바람은 성두에 모질게 휩쓸고
울울한 장기는 백척루에 가득 찼도다
푸른 물결 성내 굽이치는 저녁녘
멀리 푸른 산도 가을의 슬픔을 띠었도다.
내 마음 한결 왕자 보기를 싫어하건만
나그네의 꿈엔 용상(龍上)이 자주 보이도다.
나라의 존망은 얻어 들을 길 없고
저녁놀 강산을 뒤덮을 제 홀로 고주에 엎드렸도다.
-제주도로 떠나는 광해군作-
2005. 08. 04
사진 및 참고자료: 광해군 소고 - 최동건, 몇몇 블러그
'가고싶은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파주 보광사와 연화공원 (0) | 2006.04.22 |
---|---|
[스크랩] 융건릉 (0) | 2006.04.22 |
[스크랩] 성주사지의 외침 (진짜가 사는법) (0) | 2006.04.22 |
[스크랩] 독산성과 세마대 (0) | 2006.04.22 |
[스크랩]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0) | 2006.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