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싶은 곳

송광사

바보처럼1 2006. 4. 23. 00:51
죽은 향나무에 죽비를 내리치다
송광사와 인암 스님 이야기
  안병기(smreoquf2) 기자   
▲ 삼청교와 우화각. 우화각에서 흐르는 계류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송광사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이다.
ⓒ 안병기
법정스님을 처음 만나다

시절은 바야흐로 1984년 봄이었다. 선암사를 떠나 굴목재를 넘어 송광사에 도착했다. 송광사를 지나쳐서 곧장 법정 스님이 계시는 불일암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뛰다시피 산길을 올라갔다. 숨을 할딱이며 30여 분이나 올라갔을까. 그제야 두 채의 초가집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게 바로 불일암이었다. 싸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툇마루에 볕 바라기를 하고 계셨다, 나를 보더니 딱 한 마디를 내놓으신다.

"우물에 가서 세수부터 하고 오너라."

스님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스님은 다만 작설차를 따라 주실 뿐이었고 난 받아 마셨을 뿐이다. 2리터 크기의 물주전자에다 두 번의 찻물을 끓였으니 모두 4리터의 차를 마신 셈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던 것일까. 굳이 그 무상(無常)의 시간을 저울질할 필요가 있으랴.

방안으로 들어간 스님께서 몇 권의 책을 꺼내오셨다. 바로 전해에 입적하신 구산선사 법어집 <석사자>와 자신이 쓴 책 <무소유>등을 선물로 주셨다. 스님은 자신이 전화를 할 터이니 송광사에 내려가서 며칠 쉬다 가라고 하신다. 그 길로 하직 인사를 드리고 돌아섰다. 그제야 스님이 내 등 뒤에다 대고 다시 한 마디를 내놓으신다.

"큰일을 하려면 제 몸을 잘 돌봐야 한다."

송광사를 향해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왔다. 송광사 아래 신평마을이 조계산 자락을 베고 누워 꿈 없는 잠에 들어 있었다.

▲ 세월각과 척주각. '구슬을 씻는다'는 뜻을 가진 척주각은 죽은 남자의 혼을 씻어주는 곳이며 '달을 씻는다'는 뜻을 가진 세월각은 죽은 여자의 혼을 씻어주는 곳이다.
ⓒ 안병기
일주문을 들어섰다. 몇 걸음을 떼자 척주각과 세월각이 나온다. 이 두 전각 앞에 할머니들 20~30여 명가량이 모여서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한 스님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스님의 행색은 초라했다. 말 그대로 누덕누덕 기운 납의(衲衣)를 걸치고 있었다. 스님은 그저 홀로 돛 달고 홀로 노를 저어가며 지국총 이야기의 바다를 저어갈 뿐이다.

높이 약 15m가량 되어 보이는 이파리도 달리지 않고 가지도 뻗어있지 않은 밋밋한 기둥. 살아있는 나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썩은 기둥도 아닌 정체불명의 고향수(古香樹)라는 물건이 스님이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스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송광사를 중창한 보조국사는 자신이 입적하기 전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심으며 이같이 설레발을 쳤다 한다.

"향나무야, 향나무야. 너와 나는 생사고락을 같이하자꾸나. 내가 죽으면 너 또한 숨죽였다가 내가 후생에 태어나 이 도량에 다시 오거든 그때는 너도 다시 새 잎을 피우며 나랑 같이 살자꾸나."

▲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하기 전에 꽂았다는 향나무 지팡이. 그러나 현실의 나는 결코 전설은 완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 안병기
무심한 세월은 살같이 흘러 어느덧 80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나버렸다. 그러나 이 고향수는 아직도 썩지 않고 보조스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저렇게 서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얼굴이 참외같이 노랗고 주름이 수세미같이 쭈글쭈글한 스님이 마음속 주장자를 꺼내 높이 들어 "할"을 외치셨다.

"괘씸타, 이 고향수야! 네가 죽었으면 정녕 썩어 문드러져야 도리 옳고 아니 죽었다면 무성하게 잎을 피워서 무더운 여름날 지나가는 길손의 땀이라도 씻어주는 그늘이 되든지 해야 마땅하거늘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헛것이 어찌 감히 사람을 우롱한단 말이냐!

이 싸가지라곤 어림 반 푼어치 없는 놈의 향나무야, 오지도 않을 보조국사 지눌일랑 혀 빠지게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눈보라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과부방 구들장이나 데우는 땔감이 되는 것이 어떠한고?"

스님의 섬진강 구비구비 같은 일장 연설이 끝나자 할머니들은 손뼉을 치며 가가대소를 터뜨린다. 여기에 탄력을 받았는지 스님이 한 가지 예화를 들려주시는 거다.

언젠가 송광사를 방문한 노산 이은상이 스님과 이 고향수 앞에서 누가 더 멋지게 시조를 짓나 내기를 했다 한다. 노산 이은상이 먼저 운을 뗐다.

어디메 계시나요 언제 오시나요
말세 창생을 뉘 있어 건지리까
기다려 애타는 마음 임도 하마 아시리.


이번엔 인암 스님 차례였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지은 시조를 읊는다는 게 쑥스러운지 약간 목소리를 내리깐다.

살아서 푸른 잎도 떨어지는 가을인데
마른 나무 앞에 산 잎 찾는 이 마음
아신 듯 모르시오니 못내 야속합니다.


내가 듣기에 이 시조 경연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인암 스님의 되치기 한판승이 분명했다. 노산의 시조가 채 만져지지 않는 관념의 허공을 걸려 있다면 인암 스님의 시조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자의 진솔함이 있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 있다면 내 짧은 재주로는 언감생심 인암 스님의 맛깔스런 이야기 버전(version)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음악에는 시김새라는 게 있다. 악보의 음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감정과 느낌에 따라 음표와 음표 사이에 꾸밈음을 집어넣어 노래를 물 흐르듯 멋스럽게 부르는 기법을 말한다. 이 시김새는 사람마다 다른데 잘 익어 곰삭은 소리를 일러 시김새가 좋다고 한다. 내가 제아무리 맨발 벗고 뛰어봤자 스님의 이야기 시김새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 우화각에서 바라본 돌다리. 우측 돌출된 건물이 지금은 종무소로 쓰이는 임경당이다.
ⓒ 안병기
유소유를 장려하다

스님은 이야기로 할머니들의 마음을 쥐락펴락, 당겼다가 늦췄다가 마음대로 했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할머니들은 홍소를 터뜨리며 스님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저마다 고쟁이 속 주머니를 뒤져 스님의 허리춤에다 1000원짜리 지전을 찔러주는가 하면 사탕을 준다, 떡을 준다 이런 야단법석이었다. 그것은 내가 본 한국 불교 최초의 '오빠부대'였으며 '팬클럽'이었다.

아아, 바로 몇 걸음 안 떨어진 불일암에서는 '무소유'를 외치는 법정스님의 외침이 그토록 청청하건만 바로 그 턱밑인 송광사에서는 공공연한 '유소유'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다니. 그것도 대낮에 말이다. 난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유소유'를 실천(?)하시는 스님의 법명은 인암스님이셨다. 스님은 자신을 열여덟 살에 동자승으로 송광사에 들어와서 60여 년을 송광사에 있으면서 6.25 전란에 불타버린 송광사의 중창 불사를 하느라 애쓰다 보니 몸에 병이 들어 곤고하기 짝이 없다고 하신다. 자신의 곤한 처지마저 칼로리 넘치고 감칠 맛나게 하신다. 그러니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면 '뿅'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들에게 있어 인암 스님은 더는 수도승이 아니었다. 그저 자기들과 똑같이 늙고 병들고 힘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의 심정은 예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스님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스님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나마저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무 인암스님이시여. 앞으로도 부디 당신의 '유소유'를 줄기차게 실천하시기를, 그리고 그 돈 모아두셨다가 이담에 극락에 가셔서 지눌 스님을 만나거든 푸지게 막걸리나 한잔 나누시구려!

▲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승보전. 왼쪽에 비싸리구시가 보인다.
ⓒ 안병기
▲ 어느 절의 구시보다 큰 송광사 비싸리구시. 승보사찰의 위용을 말해주는 듯 하다.
ⓒ 안병기
고향수를 지나 우화각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도록 스님의 꽉 차 있어 답답한 주머니 속을 삐칠 비칠 삐져나와 서로 먼저 바깥바람을 쏘이려는 이야기들의 눈물겨운 몸싸움은 끊일 줄 몰랐으니 이윽고 승보전 옆에 이르러 새로운 이야기하나가 세상구경을 하기에 이른다. 그곳엔 용도불명의 속이 움푹 파인 통나무 통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비싸리구시'였다.

"요 물건이 도대체 무엇이냐? 어떤 여고생들은 이 통을 보고 아이고 중들이 여그서 꾀 벗고 목간허던 목간통인가 보다 호호호 웃고 할머니들은 아따, 중들이 얼마나 밥을 많이 먹는디 요로코롬 밥통이 크다냐 히히히 웃는디 요 물건이 어디 쓰는 물건이냐면 초 파일날 사부대중 먹일 밥 퍼담어 놓는 통이여.

이 나무를 오대산에서 궁궐 기둥으로 쓸려고 베는디 꿈쩍하지를 않어. 야, 이눔아. 임금님 계신 궁궐 기둥으로 쓸라는디 한 번 움직여봐라. 그래도 소용없어. 지리산, 화엄사, 속리산, 법주사.... 왼갖 절 이름을 불러제껴도 당최 꿈쩍을 안 하거든. 그래서 마지막으로 송광사 절 기둥으로 쓸란다고 허니깨 슬슬 움직이더란 것이여."

스님은 이 나무가 싸리나무라는 것이었지만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얘기였다. 얼핏 보아도 지름이 2m 이상 되는 듯하고 쌀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다는 이 나무가 싸리나무라니. 내가 아는 싸리나무의 굵기는 겨우 2~3cm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사찰이나 궁궐의 기둥이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속설은 곳곳에 넘쳐난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만 옳을 것인가. 이 나무는 실제로는 '괴목'이라 불리는 느티나무라고 한다. 느티나무는 아름다운 무늬와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면서도 가공하기 쉬운 나무라는 이유로 조상이 애용했다. 그렇다면 어쩌다 느티나무가 싸리나무로 잘못 알려졌을까?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던 느티나무를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차츰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로 전이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인암 스님의 입가에선 마치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가 되어버린 언어들이 파닥거렸다. 이 비싸리구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할머니 부대'들이 '스님 오빠'의 허리춤에다 때에 절은 1000원짜리를 찔러준다. 스님의 재테크가, 그 밉지 않은 '유소유'가 보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 지장전 앞에 서 있는 배롱나무. 20여년이 지났으나 자라지 않은 채 그대로인 것 같다.
ⓒ 안병기
마지막으로 당도한 것은 지장전 앞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 스님은 그 나무를 '간지럼 타는 나무'라 했다. 실제로 그 나무는 이파리 하나를 건드리자 점점 크게 일렁이더니 나중에는 나무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송광사 인암 스님

인암스님은 1908년 송광사 아랫마을인 낙수리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입산 성남스님의 회상에 들었다.

인암스님은 평소 시조 형식으로 일기를 작성했는데 스님의 상좌들이 1987년 〈인암시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 놓았다. 스님은 이 시조집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을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아침 문 일찍 열면 산(山)을 즐긴 마음이오. 저녁 창(窓) 늦게 닫음은 달을 사랑한 탓인데, 백운(白雲)에 절을 한 것은 무애자재(無碍自在) 따르고파."

인암스님은송광사 스님 사이에서 "공부 좀 한 스님이구먼!"이라는 말로 회자된다. 젊은 시절 어느 초파일에 혼자 뜰에서 삼매에 빠져있던 비구니 스님을 보고 몰래 다가가 가슴을 만졌다. 그런데 그 비구니 스님이 아무 반응이 없이 가만히 있자, 인암스님은 마치 큰 스님이 공부를 점검하는 듯한 목소리로 "공부 좀 한 스님이구먼!"이라고 해서 상황을 무마시켰던가 보다.

한시도 송광사를 버린 적이 없던 스님은 1886년 78세를 일기로 입적하셨다. 내가 송광사를 처음 찾앗던 4년 뒤의 일이다. / 안병기
스님은 이 나무의 진짜 수종을 알지 못했으며 나무 이름을 알려고 덤비는 할머니도 없었다. 현상보다는 본질이 중요한 법이라는 걸 깨우친 노 보살들이었다. 아니, 그냥 스님의 이야기가 좋았으리라.

나무는 배롱나무였다. 배롱나무는 속칭 '간지럼타는 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나는 하나의 이파리가 다른 이파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잠시 묵상했다. 공동체_그 함께 무너짐에 대하여 혹은 동병상련에 대하여.

중생의 병이 바로 나의 병이다

"모든 중생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불설 유마힐 소설경>에 나오는 말이다. 20여 년도 더 세월을 흘려보낸 다음 다시 세월각 앞에 멈춰 서서 인암 스님을 떠올린다. 그때의 일은 내겐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나는 그 할머니들이 <불설 유마힐 소설경>을 읽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날 내가 본 할머니들은 스님의 병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분명 유마힐의 현신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은 넓고 이이기꾼은 지천이다. 오래전부터 이 조선 천지에서는 글씨 하면 한석봉이요, 구라하면 황구라 황석영이란 말이 전해왔다. 그러나 인암 스님의 존재를 알고 나면 그 말이 얼마나 허랑한 말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인암 스님은 그 후로 광주문화방송 등 로컬 프로에도 몇 번 출연하시기도 하다가 1986년 입적하신 걸로 안다. 벌써 극락에서 만났을 보조국사 지눌과 인암 스님. 이 두 스님은 지금 무얼 하실까. 그들도 무료한 시간이면 이승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설핏 풋잠이라도 들게 되면 송광사의 봄날을 꿈꾸리라.
☞송광사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광주, 곡성을 지나 송광사 나들목(주암) 우회전→보성 방면 27번 국도→주암호반도로→송광사

  2006-04-22 20:48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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