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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보살을 형상화 한 불상은 무척이나 다양합니다. 불보살의 명호가 수 천 수만이 되니 우선은 그 이름조차가 무지기수입니다. 크기나 생김새가 사뭇 다르고 재질 또한 다양합니다. 철(鐵)로 만들어진 철불이 있는가 하면 동(銅)으로 조성된 금동불도 있고, 나무로 만들어진 목불과 종이로 만들어진 지불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돌로 조성된 석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불모(佛母)에 의해 조성된 이런저런 대개의 불상들은 법당이나 경내에 봉안되어 절을 찾는 이들에게 불심을 일으키게 하며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절을 찾을 때 불구(佛具)를 봄으로 부처님을 떠올리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겠단 의지를 가다듬게 됩니다. 그러니 절을 찾는 그 자체만으로도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게 됩니다. 상중생이기에 절을 찾아가 불상이나 불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심이 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과하다 싶을 만큼 불구가 장엄되고 확대되는 것이 통용되는 지도 모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음흉한 마음이나 사악한 마음을 먹었다가도 불상을 보게 되면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됩니다. 분노하고 증오하다가도 불상 앞에 서면 아량과 자비의 마음이 생깁니다.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에 금방 큰일이라도 낼 듯 좌불안석을 하던 마음도 부처님을 뵙게 되면 본래의 평온함으로 마음을 잡아가는 게 절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산사엘 들렸거나 아니면 어느 산길을 가다 가끔은 바위에 조각된 불상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돌에 조각된 불상을 마애불(磨崖佛)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애불이야말로 신토불이에 토박이 불상입니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들이야 불모가 다른 곳에서 조성 한 것을 법당으로 옮겨와 봉안한 부처님이지만 마애불들은 그 자리에 뿌리박고 있는 거대한 바위에 불신을 조각하여 불보살을 새겼으니 신토불이에 토박이 불상인 셈입니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들은 그 전각들이 바람 막아주고 눈비 가려주지만 마애불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일 뿐입니다.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오면 눈에 묻힙니다. 찾아오는 이 있으면 반겨주고 찾아오는 이 없으면 묵언의 수행이라도 하듯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때론 다람쥐의 놀이터가 되고, 날아가던 새들이 쉬어가는 휴식처가 되기도 하지만 깊은 불심을 불러일으키기엔 더 없는 불상입니다. 사람들은 마애불을 보며 역사를 생각하고 그 규모나 조성기법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곡선이 섬세하니 체형이 어떠니 하며 시대적 배경을 분석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마애불이 영험하니 어쩌니 하며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릅니다. 방랑하듯 돌아다니다 보면 그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마애불을 꽤나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 있고 어떤 형체를 하고 있든 마애불을 보면 제일 먼저 "뚝딱"거리는 망치소리가 환청처럼 들립니다. "뚝딱 뚝딱, 뚜둑둑 뚝딱!" 매달린 듯, 걸터앉은 듯 바위에 달라붙어 정으로 암반을 쪼던 석수장이의 애달픈 망치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에 들립니다. 그 석수장이는 수행중인 스님일 수도 있고 뛰어난 돌 조각가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정 하나에 망치 하나 움켜쥐고 "뚜둑 딱 뚝딱"거리며 밑그림을 그리고 부처님을 조각하였을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불상이 조각되기 전까지 그 돌은 그냥 하나의 돌이었을 뿐입니다. 지나가던 과객이 눈길 피해 대소변을 보던 용변의 자리였을 수도 있고, 아랫마을 처녀총각이 정분 나누던 밀애의 장소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 자리서 눈가림용 아니면 표석으로 통용되던 한낱 커다란 바위였을 게 뻔합니다.
마애불에는 석수장이거나 스님이거나 불심 깊은 한 사람의 지극한 정성과 고뇌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손바닥에 잡힌 물집이 연거푸 불거지다 못해 두툼한 군살로 못 박히고, 스치듯 내려치는 망치에 얻어맞은 열 손가락엔 피멍 멈출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리 빛 얼굴은 요동치는 어깨근육에 숨 죽인지 오래입니다. 오열하듯 흘러내리는 땀줄기는 도랑을 이루었고, 한 겨울이면 그 땀줄기가 고드름을 맺었을지도 모릅니다. 작열하는 태양도, 불어오는 삭풍도 온몸으로 맞으며 한 땀 한 땀 새겨 넣은 불심의 흔적이 바로 마애불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야 망치 끝 정이 꾸렸지만 혼을 불어넣고 아름다움을 불어 넣은 건 역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기에 석수장이의 눈은 차갑도록 예리하기도 하지만 주변을 녹일 만큼 따습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게 탄생하여 수백 수천 년, 그 자리에 지켜 서서 구도의 대상이 되고 발원의 대상이 되었을 마애불이기에 그 앞에 서면 몸과 마음이 숙연해짐은 어쩜 당연한 일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는 많은 마애불 중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보호대상이 된 마애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마애부처님들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 수많은 마애불 중 파주 용미리의 용암사 마애불, 안동의 제비원 마애불 그리고 고창 선운사에 있는 도솔암 마애불을 한국의 3대 마애불로 손꼽습니다.
숲길에 맞닿은 마당으로 들어서면 마당 중앙에 5층 석탑이 서 있고 한 단 높게 자리한 대웅보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맞배지붕 형식의 대웅보전은 정면 3칸 규모입니다. 단청이나 기둥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 확인해 보니 몇 년 전 소실되어 새로 불사되었다고 합니다. 새로 불사된 대웅전은 단정하고 깔끔합니다. 대웅전에서 어간을 열고 바라보면 진입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들어서는 진입로 오른쪽에는 범종각이 있고 마당 우측으로 종무소를 겸한 요사가 있습니다. 마당으로 들어서 왼쪽으로 난 돌계단을 돌아 올라가면 거대한 쌍석상이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17.4m나 된다는 그 규모의 높이에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고 두 손을 합장하게 됩니다. 꺾일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우러러보는 쌍석불의 규모는 당당하고 웅장합니다.
그 자리에 우뚝 한 토속바위에 입체적으로 불신을 암각하고 머리 부분을 조각하여 얹은 듯합니다. 불신과 불두의 암질이 다르게 보일 뿐 아니라 연결부분인 듯 틈이 보입니다. 참 묘합니다. 어찌 이런 산세에 저런 형태의 바위가 솟았으며, 이와 같은 구도를 잡아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단 말입니까? 불상이야 석공의 손을 빌어 조성되었겠지만 바위 자체가 완만한 불신을 하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가사자락인 듯 휘휘 늘어트린 옷매는 눈길 따라 나풀대고, 띠 매듭과 옷 주름이 분명합니다. 저리도 곱상한 자태 뒤에 숨었을 석공의 망치소리와 땀줄기가 흐릿하게 녹아날 듯합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으면 마르거나 달았을 법도 한데, 세월의 무게로, 불상의 모습으로 석공의 정성과 불심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오른쪽 불상, 사각 갓을 쓴 불상은 두 손을 합장하고 있습니다. 수백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합장한 저 자세로 서 있으며 무엇을 기원하고 발원하였을까 궁금해집니다. 국태민안을 발원하였을까? 아니면 무병장수나 만사형통을 기원해 주었을까? 그러나 아무래도 미래를 관장할 미륵보살님이니 현세의 중생들이 별 고통 없이 윤회의 도를 따라 내세에 닿을 수 있길 발원하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불상의 불두는 물론 불신 곳곳에 마마자국인 듯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이 흔적들은 민족상잔의 딱지며 역사의 상흔입니다. 6·25때 총격에 의해 생긴 탄흔이 저렇듯 마마자국 같은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총부리 겨누는 전쟁은 끝났으나 당시의 아픔과 비통함은 이렇듯 흔적으로 남겼는가 봅니다. 용암사 마애불은 미륵불입니다. 둥근 갓을 쓴 왼쪽 불상이 미륵불이며, 사각 갓을 쓴 오른쪽 불상이 미륵보살이라고 합니다. 미륵불은 현세불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하고 56억7천만년 후에 세상에 도래한다는 부처님입니다.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는 미래의 부처님입니다. 그런 부처님이 이미 수백 년 전 용미리에 쌍불로 현신한 모양입니다.
고려 선종(宣宗)과 원신궁주(元信宮主)는 금실이 좋았으나 대 이어갈 후손이 생기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대 이을 후손을 두지 못한다는 건 칠거지악의 하나며 불효중의 불효였던 시대였습니다. 일반백성도 그런데 하물며 국왕에게 대를 이을 왕자가 잉태되지 않는다는 건 그 근심이 궁궐의 담을 넘어 대국적 중대사가 아닐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궁주는 명산대찰을 찾아 온갖 치성을 올리며 간절하게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궁주의 꿈에 두 고승이 홀연히 나타나 났습니다. 그러더니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으나 근래 양식이 떨어져 퍽이나 어렵습니다. 다만 바라는 건 그곳 큰 바위에 불상을 새겨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리하면 그대의 소원은 성취될 것이요'하고는 홀연히 사라지더랍니다.
궁주는 불상을 조성하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치성을 드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 고승이 다시 나타나 "왼 바위에는 미륵불, 오른 바위에는 미륵보살을 조성하라" 말을 하더니, 그리고 돌아서며 지나가는 말처럼 "누구든 여기 와서 공양과 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풀 것이야. 아이를 바라면 아이를 잉태를 할 것이고, 앓는 이는 병석에서 일어날 것이고…" 하더랍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궁주의 적극적 발원으로 커다란 바위에 미륵불과 미륵보살이 조성되니 그 쌍불이 현재의 용미리 미륵불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 고승의 말처럼 선종과 궁주 사이에 왕자가 태어나니 그 왕자가 한산후(漢山侯)라고 합니다. 꿈속에서 고승이 지나가는 말처럼 하였던 "아이를 바라면 잉태할 것이고, 앓는 이는 병석에서 일어날 것이고"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면서 요즘도 절손의 위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올려 영험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에 아직 후손을 두지 못한 두 고부가 치성을 올리러 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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