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말세의 희탄(희歎)..................이 상화

바보처럼1 2006. 5. 6. 23:43

<말세의 희탄>

 

저녁의 피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 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거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백조창간호(1922.1) 수록

*희탄: 탄식하여 흐느껴 울다.

 

 

<이중의 사망>

 

죽음이다!

성낸 해가 이빨을 갈고

입술은 묽으락 푸르락 소리없이 훌쩍이며,

유린 받은 계집같이 검은 무릎에 곤두치고 죽음일다.

 

만종(晩鐘)의  소리에 마구를 그리워 우는 소-

피란민의 마음으로 보금자리를 찾는 새-

다 검은 농무(濃霧) 속으로 매장이 되고,천지는 침묵한 뭉텅이 구름과 같이 되다!

 

아, 길 잃은 어린 양아, 어디로 가려느냐?

아, 어미 잃은 새 새끼야, 어디로 가려느냐?

비극의 서곡을 리프레인하듯

허공을 지나는 숨결이 말하더라.

 

아, 도적놈이 죽일 숨 쉬듯한 미풍에 부딪혀도

설음의 실패꾸리를 품기 쉬운 나의 마음은

하늘 끝과 지평선이 어둔 비밀실에서 입맞추다.

죽은 듯한 그 벌판을 지나려 할 때 누가 알랴.

 

어여쁜 계집애 씹는 말과 같이

제 혼자 지줄대며 어둠에 꿇는 여울은 다시 고요히

농무에 휩싸여 맥 풀린 내 눈에서 껄덕이다.

바람결을 안으려 나부끼는 거미줄같이

헛웃음 웃는 미친 계집의 머리털로 묶은

아, 이 내 신령의 낡은 거문고 줄은

청철(靑鐵)의 옛 성문으로 닫힌 듯한 얼빠진 내 귀를 뚫고

울어 들다 울어 들다, 울다는 다시 웃다-

악마가 야호(野虎)같이 춤추는 깊은 밤에

물방앗간의 풍차가 미친 듯 돌며

곰팡스런 성대로 목메인 노래를 하듯.........!

저녁 바다의 끝도 없이 몽롱한 먼 길을

운명의 악지바른 손에 끄을려 나는 방황해 가는 도다.

남풍(嵐風)에 돗대 꺾인 목선(木船)과 같이 나는 방황해 가는도다.

 

아, 인생의 쓴 향연에 불림 받은 나는 젊은 환몽(幻夢) 속에서

청상(靑孀)의 마음과 같이 적막한 빛의 음지에서

구차(柩車)를 따르며 장식(葬式)의 애곡(哀曲)을 듣는 호상객처럼-

털 빠지고 힘 없는 개의 목을 나도 드리우고

나는 넘어지다- 나는 거꾸러지다!

 

죽음일다!

부드럽게 뛰노는 나의 가슴이

주전 빈랑(牝狼)의 미친 발톱에 찢어지고

아우성치는 거친 어금니 깨물려 죽음일다!

 

*백조3호(1923.9) 수록

*일제 식민지 밑에서 답답스러운 울부짖음이다.

*농무; 짙은 안개

*리프레인(refrain):후렴. 반복함.

*야호: 야산의 호랑이

*악지바른: 무리하게 고집을 세우는

 

 

<시인에게>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 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

가뭄 든 논에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있어야 하듯.

 

새 세계란 속에서도

마음과 몸이 갈려 사는 줄 풍류만 나와 보아라.

시인아, 너의 목숨은

진저리 나는 절름발이 노릇을 아직도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일식된 해가 돋으면 뭣하며 진들 어떠랴.

 

시인아, 너의 영광은

미친 개 꼬리도 밟는 어린애의 짬 없는 그 마음이 되어

밤이라도 낮이라도

새 세계를 낳으려 손댄 자국이 시가 될 때에 있다.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아라.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이 나라 시인들에게 기대를 거는 작자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