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의 희탄>
저녁의 피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 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거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백조창간호(1922.1) 수록
*희탄: 탄식하여 흐느껴 울다.
<이중의 사망>
죽음이다!
성낸 해가 이빨을 갈고
입술은 묽으락 푸르락 소리없이 훌쩍이며,
유린 받은 계집같이 검은 무릎에 곤두치고 죽음일다.
만종(晩鐘)의 소리에 마구를 그리워 우는 소-
피란민의 마음으로 보금자리를 찾는 새-
다 검은 농무(濃霧) 속으로 매장이 되고,천지는 침묵한 뭉텅이 구름과 같이 되다!
아, 길 잃은 어린 양아, 어디로 가려느냐?
아, 어미 잃은 새 새끼야, 어디로 가려느냐?
비극의 서곡을 리프레인하듯
허공을 지나는 숨결이 말하더라.
아, 도적놈이 죽일 숨 쉬듯한 미풍에 부딪혀도
설음의 실패꾸리를 품기 쉬운 나의 마음은
하늘 끝과 지평선이 어둔 비밀실에서 입맞추다.
죽은 듯한 그 벌판을 지나려 할 때 누가 알랴.
어여쁜 계집애 씹는 말과 같이
제 혼자 지줄대며 어둠에 꿇는 여울은 다시 고요히
농무에 휩싸여 맥 풀린 내 눈에서 껄덕이다.
바람결을 안으려 나부끼는 거미줄같이
헛웃음 웃는 미친 계집의 머리털로 묶은
아, 이 내 신령의 낡은 거문고 줄은
청철(靑鐵)의 옛 성문으로 닫힌 듯한 얼빠진 내 귀를 뚫고
울어 들다 울어 들다, 울다는 다시 웃다-
악마가 야호(野虎)같이 춤추는 깊은 밤에
물방앗간의 풍차가 미친 듯 돌며
곰팡스런 성대로 목메인 노래를 하듯.........!
저녁 바다의 끝도 없이 몽롱한 먼 길을
운명의 악지바른 손에 끄을려 나는 방황해 가는 도다.
남풍(嵐風)에 돗대 꺾인 목선(木船)과 같이 나는 방황해 가는도다.
아, 인생의 쓴 향연에 불림 받은 나는 젊은 환몽(幻夢) 속에서
청상(靑孀)의 마음과 같이 적막한 빛의 음지에서
구차(柩車)를 따르며 장식(葬式)의 애곡(哀曲)을 듣는 호상객처럼-
털 빠지고 힘 없는 개의 목을 나도 드리우고
나는 넘어지다- 나는 거꾸러지다!
죽음일다!
부드럽게 뛰노는 나의 가슴이
주전 빈랑(牝狼)의 미친 발톱에 찢어지고
아우성치는 거친 어금니 깨물려 죽음일다!
*백조3호(1923.9) 수록
*일제 식민지 밑에서 답답스러운 울부짖음이다.
*농무; 짙은 안개
*리프레인(refrain):후렴. 반복함.
*야호: 야산의 호랑이
*악지바른: 무리하게 고집을 세우는
<시인에게>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 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
가뭄 든 논에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있어야 하듯.
새 세계란 속에서도
마음과 몸이 갈려 사는 줄 풍류만 나와 보아라.
시인아, 너의 목숨은
진저리 나는 절름발이 노릇을 아직도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일식된 해가 돋으면 뭣하며 진들 어떠랴.
시인아, 너의 영광은
미친 개 꼬리도 밟는 어린애의 짬 없는 그 마음이 되어
밤이라도 낮이라도
새 세계를 낳으려 손댄 자국이 시가 될 때에 있다.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아라.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이 나라 시인들에게 기대를 거는 작자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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