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한 용운............님의 침묵

바보처럼1 2006. 5. 12. 23:29

<님의 침묵>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1926.4) 수록

*주제는 족국을 잃은 슬픔과 광복에의 신념

*님: 조국-자연-불타 그 모두일 수 있다.

*5행: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했다.

*10행: 시정의 절정을 이룬 곳이다.

 

 

<찬송>

 

임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임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 걸음이여.

 

임이여 당신은 의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우신 것을 잘 아십니까.

거지의 거친 발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임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임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임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의 봄바람이여.

 

 

<이별>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 사랑의 이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임과 임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칼로 벤 이별의 키스가 어디 있느냐.

생명의 꽃으로 빚은 이별의 두견주(杜鵑酒)가 어디 피의 홍보석으로 만든 이별의 기념 반지가 어디 있느냐.

이별의 눈물은 저주의 마니주(摩尼珠)요 거짓의 수정(水晶)이다.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혹은 직접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간접의 사랑이라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애인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한다면 무궁을 회전하는 시간의 수레 바퀴에 이끼가 끼도록 사랑의 이별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참"보다도 참인 임의 사랑엔 죽음보다도 이별이 훨신 위대하다.

죽음이 한 방울의 찬 이슬이라면 이별은 일천 줄기의 꽃비다.

죽음이 밝은 별이라면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치는 무형(無形)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잊지 못하고 이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웃지 못하고 이별에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인을 위하여는 이별의 원한을 죽음의 유쾌(愉快)로 갚지 못하고 슬픔의 고통으로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차마 죽지 못하고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곳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애인의 포옹만 사랑할 뿐 아니라 애인의 이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때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간단(間斷)이 없어서 이별은 애인의 육(肉)뿐이요 사랑은 무궁이다.

 

아아,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은 칼을 주는 것이요, 이별은 꽃을 주는 것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 선이요 미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잔다르크다.

 

 

<당신을 보았읍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읍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 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르로 추수가 없읍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 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읍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돌아올 때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읍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읍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읍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취한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읍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읍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읍니다.

 

 

<수(繡)의 비밀>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읍니다.

심의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읍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뿐입니다.

 

그 주머니에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읍니다.

짓다가 놓아 두고 짓다가 놓아 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읍니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랴면,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읍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이다.

 

 

<예술가>

 

나는 서투른 화가여요.

잠 아니 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이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새암 파지는 것까지 그렸읍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적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읍니다.

 

나는 파겁(破怯)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이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읍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읍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는 너무도 소질이 업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읍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적은 돌도 쓰겠읍니다.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집<님의 침묵> 수록

처음 5행까지의 "누구"는 자연, 마지막 행의 "누구"는 절대자이다.

*주제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고백의 노래

*수사법상으로는 상징시. 매 연 끝을 "입니까"로 한것은 제목과의 상응,신비감.각운 등의 효과를 노려서이다.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읍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소재가 된 것은 " 복종-자유-당신"의 세 가지.

이 시의 "당신"은 만해의 "님"-조국이나 부처, 곧 절대적존재이다.

*주제는 절대자에의 복종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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