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의 은거지 화양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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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음풍농월하던
화양구곡의 절정 암서재 |
청천에 있는 우암의 묘소를 내려와 해저문 길을 화양동으로 옮긴다. 박대천(博大川) 계류를 따라 10리 길을 달려왔을 땐, 이미 어둠이 골골이 내려 덮인다. 화양동 토박이 노인을 만나고 삼경이 다 되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객창에 스민 여수는 짧은 초여름 밤을 이리 뒤척 저리 딩굴이다. 산골을 울리는 여울물 소리는 점점 소요스럽고, 소쩍새 외짝 울음은 언제나 혼자뿐인 역마길을 마냥 고적하게 뒤흔들어 놓는다. 무어 객살이 끼었기에 이리도 하고한 날을 먼 길로 헤매는가. 길동무 하나 없이 떠도는 발뒤축은 낯선 밤을 설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련만, 산팔짜 물팔짜도 이만하면 다한(多恨)이런가.
푸르스름한 새벽 그믐달이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신들린 낭심은 문을 박차고 개울가로 나선다. 자욱한 골안개, 싸늘한 밤 공기가 긴 팔소매를 싸늘하게 음습한다.
바윗돌에 걸터앉아 사념은 하염없이 심층저변으로 침전되고, 별빛은 사위어 물길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수륙만라를 떠나 등불 앞에 번뇌하던 여정도 빛바랜 한숨이 되고, 동천엔 은
장막이 엷어져 간다.
날이 밝으면서 화양천(華陽川)을 거슬러 구곡(九谷)을 차례로 훑어 오른다. 서풍이 산비탈로 내려 불더니 구름이 일고 날빛이 무겁다. 송면까지 8km의 계곡을 샅샅이 헤쳐보기 위해서는 빗발이 뿌리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녹수는 성난 듯 소리쳐 흐르고 청산은 찡그려 말이 없구나. 산수(山水)의 깊은 뜻을 생각하노니 세파에 인연함을 저어하노라.
일찍이 우암이 화양동에 은거하며 빼어난 산수와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시 한 편이다.『택리지』에 화양동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골이 깊고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바위와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만 번 돌고 도는 모양은 다 적어낼 수가 없다. 어떤 이는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하여, 웅장한 점은 좀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 이만한 수석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의 제일이 될 것이다. 청화산(靑華山)이 내외로 선유동(仙遊洞)을 위에 두고, 앞에는 용유동(龍遊洞)을 임하여서, 앞뒤 수석의 기절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큰 것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한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이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煞氣)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이 나타나서 가리운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다. "
화양계곡의 구곡의 유래는 우암이 은거하며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谷)을 본떠, 명소마다 이름을 붙여두었다. 구곡의 승경은 제1곡 경천벽을 시작으로 운영담(雲影潭) 읍궁암(泣弓岩)·금사담(金砂潭)·첨성대(瞻星臺)·능운대(凌雲臺)·와룡암(臥龍岩)·학소대(鶴巢臺)·파천까지 제9곡이 이어진다. 경천벽과 파천 외에 나머지는 불과 몇 십, 혹은 몇 백 미터의 간격으로 지척간에 밀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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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필체인 '화양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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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터에 남은 서낭당 돌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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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벽은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마치 하늘을 떠받드는 형상을 하고 있어, 자연의 오묘한 신비를 느끼기에 족한 절승이다. 「화양동문(華陽洞門)」넉 자의 서체는 우암 자신의 필체다. 관리사무소 앞의 주차장 자리엔 하촌 부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황당 돌무지만이 남아있고, 산자수려한 천혜의
경관 덕에 휴일이면 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여 한적한 소요는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넓은 소에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운 운영담을 잠깐 스치면
이내 읍궁암. 효종의 승하 때 우암이 통곡했다는 바위다. 개울물을 지그재그로 건너 화양서원묘정비(華陽書院廟庭碑) 앞에 선다. 말할 것도 없이 화양서원의 옛터로서 만동묘가 자리하던 유적지다. 산끝 비탈면 해묵은 잡초더미 속에 주춧돌만 과거의 성시를 돌이키며 남아 있더니, 발굴을 마무리짓고
새 단장을 해 두었다. 한때, 화양묵패(華陽墨牌)의 허세로 위용을 떨치던 화양서원이 대원군에
의해 철폐의 비운을 맞은 것은 고종 연간의 일이다.로 경향 유생들의 세찬 반발에도 불구하고 670여 개의 서원을 47개로 대폭 정비해 버린
것이다. 모화사상이 두터웠던 우암이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구곡으로
이름짓고, 또한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모방해 암서재(岩棲齋) 정자를 세운 것은 그의 사대성을 가히 짐작하게 한다. 우암은 이곳에 들어온 후, 일상생활을 되도록 중국 방식을 따르기 위해 명나라 복장을 사용했다. 부인에게도 명나라 여자처럼 쪽을 찌게 하고, 아이들에게는 머리를 쌍각으로 따서 드리우게 하였으며, 명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문구를 제5곡 첨성대 절벽에 새겨 숭앙의 뜻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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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의 제2경
운영담 |
역사
속에 묻혀진 화양서원의 만동묘 비 |
느티나무 거목이 가지런한 그늘 길을 걸어 금사담 돌다리를 디디고 암서재 누대 위를 올라선다. 그 옛적 우암이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시문으로 풍류를 즐기던 곳이러니, 산천경개를 좇아 예까지 들어온 발길인데, 어찌 한 가닥 감흥이 일지 않을까 보냐. 장송이 울창하게 사위를 둘러쳤고 암벽은 소스라쳐 천공에 정자를 떠받들었다. 난간에 기대어 금사담을 구경하거니, 금모래는 내(川)바닥에 싸락으로 깔리고, 초여름의 산그림자는 물결 위에 너울댄다. 암서재를 중심으로 첨성대, 능운대까지 이 일대가 화양계곡의 심장부가 된다. 억겁의 세월 속에 하얗게 갈고 닦인 둥근 바윗돌들이 지천으로 깔려 수려한 계곡미를 더해 주고 있다. 자연의 오묘한 조화는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구나.
첨성대는 평평하고 큰 바위가 겹치어 수 백 척의 높이를 버티고 있는, 별바위와 도명산(道明山)으로 오르는 산길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홍수로 유실된 채운암(彩雲庵)터를 거쳐 산복을 가로지르다가 능선으로 올라서면, 최치원이 수도하며 조각했다는 전설의 삼존입체불에 닿게 된다. 채운암은 암서재 뒤편, 고려 시대의 고찰 환창사(換彰寺)와 통합되어 지금은 채운사로 통칭되나, 찾은 이가 드문 탓에 적막감조차 드는 조용한 사찰이다. 학소대를 거쳐 10여 분 남짓 상류로 오르면 제9곡 파천이다. 도로에서 잡목 숲을 반원형으로 돌아 내린 곳에, 널판지 모양의 거대한 평석이 반비슷 기대어 표지판 구실을 한다. 계곡 바닥이 갑자기 넓게 트이고, 백옥의 반석이 수천 평에 깔려, 그 반석 위로 맑은 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내린다. 때로 대리석 욕조를 만들기도 하고, 수상 미끄럼대를 이루기도 하여, 발 벗고 들어서면 살얼음에 썰매 타듯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다. 구곡을 모두 돌아보고 나면 우암이 화양동주(華陽洞主)라는 또 다른 호(號)를 갖추어 둔 인연을 알 만하다. 예로부터 벼슬길을 물러났을 때, 자연을 찾아 귀향하는 것은 선비들의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
2006.
5. 낭산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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