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스크랩] 춤으로 살아온 세월 70년 정민선생

바보처럼1 2006. 6. 2. 23:52


‘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70을 산다는 것이 어렵다는 예전에는 이런 말을 하며 70이 되면 장수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일에 매달려 70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대단한 기록이다. 아마 기네스북에라도 오를 수 있지 않으려는지...

“제가 5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벌써 춤을 시작한지가 70년이 지났어요. 참 오랜 세월동안 춤을 추어왔지만 그래도 이제야 겨우 무대에 서면 ‘춤이 조금 되는구나’ 싶어요.” 일본에서 태어난 정민 옹은 1928년생이시니 올해 77세가 되셨다. 광복이전부터 연극과 노래를 하면서 당시에는 아역 탤런트로 일본예술단에 있다가 그 곳에서 최현선생(작고)을 만나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전국예술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최현이를 그 곳에서 다시 만났죠. 함께 경연대회에 입상을 하고나서 가극단에 전속으로 픽업이 되었어요. 당시에는 김해랑선생님이 무용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하셨는데 최현이와 내가 서울사대를 다니면서 마산으로 내려가 김해랑선생님 문하로 들어갔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무용협회를 설립하고 이사장직을 맡아 본 김해랑선생의 학원 1기생으로 사사를 받고 그 곳에서 교사 노릇을 했다고 한다. 1933년 당시 5세의 나이로 가수로 데뷔를 해서 8세부터 무대에 오른 정민옹은 1945년 진주시 제1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슬제)에 참가하여 승무로 금상을 수상했다. 1955년부터는 각 대학과 고등학교의 특별강사로 활동을 하면서 개인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을 다니면서 리사이틀을 열어 우리 춤의 보급에 앞장을 섰다. “마산에서 한 10여년 정도 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갔어요. 가족들이 모두 일본에 있고 당시에는 예술활동을 해서 밥을 먹기가 힘든 시기였으니까요. 아마 지금 같으면 다시 들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당시의 환경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하다.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이 나에게는 커다란 분깃점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가서 발레를 했는데 영국로열발레학교 브라이언 쇼 선생에게 고전발레를 사사하고, 세기의 무희라는 알렉산더 다니로와 선생에게 명작발레를 사사하여 많은 활동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당시에 한국의 명기(名妓)들이 생활을 위해 일본에 많이 건너와 계셨어요. 저는 지금도 우리의 춤과 소리, 타악 등은 그 분들이 계셨기에 전승이 되었다고 보고 있어요. 김녹주, 김흥주, 오난영, 박금화, 최경숙, 정금옥 같은 대단한 무기(舞妓)들이 계서서 그분들을 찾아다니면서 배우고 연구를 했죠.” 그런 덕분에 현재 일본에 있는 정민류 한국전통예술총합학원에서 가르치는 무용의 숫자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한 사람이 그 많은 춤을 지키고 있기에도 버거울 텐데 정민옹은 그 많은 춤을 일일이 기억을 해가며 제자들을 키우고 계시다. “제가 많은 춤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예전 선생님들의 춤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된 것까지 하나하나 다 지키고 있어요. 지금 저희 학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춤은 축원무와 의전무, 그리고 승무와 살풀이는 물론이고 교방무인 타고무, 소고무, 장고무, 입춤, 산조무 등이 있고 검무는 각 지역의 검무를 모두 지도할 수 있어요.” 그 뿐만이 아니라 탈춤의 각 배역의 춤부터 무속무(巫俗舞), 민속무용과 남성무용인 학춤, 양반춤, 한량무, 쌍선무 등이 있다. 그리고 북춤은 외고무 부터 13고무까지 두루 섭렵하고 계시단다. “신무용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춤이 있는데 그 중에는 황진이, 옥중화, 일편단심, 이별, 석굴암의 관음보살, 명성황후, 부용당의 밤, 인생의 황혼, 애수의 선자, 고독, 추억 등이 있어요.” 종목이 하도 많아서 아예 <정민작품목록>이라는 인쇄물을 만드셨다고 하면서 보여주신다.

“과거에는 기방춤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정민하면 기방춤을 추는 사람으로 알고 지금은 일본으로 건너 와 기방춤을 배워가곤 하죠.” 7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활동을 하고 계시는 정민옹은 요즈음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이런 당부를 하신다. “제가 우리 다음 세대 무용가들에게 꼭 일러둘 말이 있어요. 첫째는 춤은 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손이 손을, 발이 발을 가르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처음 춤을 배울 때 정확한 춤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 밑에서 춤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춤은 바삐 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70이 넘도록 춤을 추었는데 65세가 넘어서야 겨우 내가 춤을 제대로 추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요즈음 사람들은 춤을 너무 빨리 추려고 해요. 제가 아는 선생님 한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돌아가실 때 제가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의 많은 춤이 있는데 돌아가신 후에 어느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 줄까요’하고 물었더니 선생님께서 ‘65세에서 70세 사이에 춘 것을 보여주어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정도가 돼야 비로소 춤 안에 혼이 들어있다는 것이죠. 김치라고 맛이 다 같을 수가 없듯이 춤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죠.” 건강이 안 좋으셔서 수술을 하셨는데도 한국에 자주 나오는 것은 그 많은 춤을 당신 혼자 지켜간다는 것이 안타까워 더 많은 제자들에게 물려주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올 10월경에 한국에서 정민류 춤판을 열 예정입니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더 많이 가르쳐야죠.”

이제 77세의 노구를 이끌고도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물려주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는 정민옹. 더 많은 무대에서 선생을 뵙기를 원한다. 그리고 더 젊은이 못지않은 활동을 하시기를 기원한다.


하주성 주간 desk@traditionart.com
출처 : 하늘을 보세요. 그 곳에 꿈이 ~
글쓴이 : 늪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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