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鼓手)로, 그리고 민속무용가로 활동을 하신 한성준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생이시다. 1875년 아버지 한천오(韓天五)와 어머니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6∼7세 때부터 외조부 백운채(白雲彩)로부터 춤과 장단을 배웠으며, 14세 때 서학조(徐學祖)에게서 줄타기와 민속예능을 배우고 홍성을 비롯한 서산, 태안 일대의 각종 연회, 굿판에 참가했다. 생활이 어려워져 유랑 길에 올라 홀로 춤과 장단 등을 배우고 익혔다. 1910년대에 들어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 등 창극단체에서 감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 등 명창들의 고수로 활동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 창립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조선무용연구소를 창설하여 민속무용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 현대무용의 기본테크닉을 배운 최승희(崔承喜)에게 조선의 춤과 민족혼을 불어넣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다. 1935년 서울에서 <한성준무용공연회>를 가진 뒤 도쿄[東京] 등 일본 주요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1941년 모던닛폰사가 제정한 예술상을 받았다. 태평무(太平舞), 학무(鶴舞) 등을 만들었으며, 민속무용 체계와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3000마디의 뼈가 움직여서 춤이 되느니라.” 반만년 역사 속에서 전해진 우리 몸짓을 이 시대에 되살려낸 한성준(韓成俊,1875∼1941) 선생이 평소 지녔던 춤에 대한 지론이다. 구한말에 태어나 평생을 일관되게 우리 춤의 자리 매김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은 그의 대표적인 춤, 승무(僧舞)가 우리 겨레가 지닌 품성과 예술적 감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한성준 선생이 살아온 삶은 그 자체가 장단이고 춤이었다고 말한다. 일상적 걸음이 춤 걸음이 되고 그것이 다시 춤 기본으로 풀어지며 예술춤으로 완결되었듯이 모든 일상적 몸짓이 춤으로, 예술 춤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애주 교수는 한성준 선생의 삶 자체에 장단과 춤이 녹아 있다고 강조한다. 춤이나 예술이 고상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민중이나 백성으로 표현되는 모든 사람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감성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 춤이되고 그것을 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창출한 작업을 하신 분이 바로 한성준 선생이시다. 그러한 것들은 선생이 정리를 한 승무를 비롯하여 살풀이, 태평무, 학춤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성준 선생은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만주와 북만주를 돌며 조선인들을 격려했다. 당시 제자요 손녀인 한영숙 선생 등과 함께 만주공연을 나서면 조선인들이 몰려와 함께 어깨춤을 추고 아리랑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고 한다. 일제 당국에게 농기구나 악기 등을 모두 빼앗긴 조선인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솥이며 그릇을 들고 나와 두들기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언제나 그 춤판은 언제나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듯이 선생은 주체성이 뚜렷하고 언제나 시대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살아가신 분이시다. 한성준선생은 춤에 조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을 하시면서 춤에 그 모든 것을 담아 표현을 하기 위해 애를 쓰신 분이다. 선생의 이 같은 현실인식은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동학에 참여했던 것도 요인이 되었다. 춤을 민중의 것으로 되돌려 놓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동학군과 만나면서 진보성을 담보한 춤으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은 선생 스스로가 반가의 후손이면서도 당시 춤을 추는 사람들을 광대, 화랭이라 하여 사회의 질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선생은 그러한 것에 연연치 않고 오히려 그러한 고된 삶을 자신의 춤세계를 이루어 나가는데 이용하였다. (자료출처/전통예술신문)
한성준 선생의 예술세계는 독보적이다. 1고수 2명창이라는 말을 가능하게 한 것이 한성준 선생이다. 한성준 선생은 태어나면서 춤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외가뿐 아니라 친가의 어른들이 모두 춤에는 일가견을 지니고 있었기에 불과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단순히 몸짓에만 머물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론을 수립하는데도 총력을 기울였다. 조선성악연구회를 비롯해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조선무용연구소 등을 설립해 춤과 장단을 정립한 것도 그 같은 까닭이다.
50세 후반에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그동안 배우고 추던 춤들을 무대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1938년에는 전통춤 교육의 산실인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민속무용가를 배출하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때 배출된 제자가 한영숙, 강선영, 김천홍 등이다.
1935년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창작전통 춤 발표회를 가졌으며 승무, 태평무, 살풀이 등을 창안했다. 궁중에서 전해오던 정재와 민간에서 추던 민속춤을 바탕으로 왕의춤, 영의정춤, 급제춤 등 40여종의 다양한 춤을 창안하고 집대성함으로써 우리 전통춤의 새로운 틀을 마련했다.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선생이 창안했거나 재구성한 춤들은 우리춤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정통성 있는 춤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가운데 승무(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와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자료출처/전통예술신문)
(사진은 홍성 한성준선생 추모제에서 춤을 추는 이애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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