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인 조상현씨의 전남 보성「도강마을」유년추억 서린 내 소리 ‘탯자리’다. 7년간 매일 10시간 이상 연습 내 소리의 탯자리로 12살 어린나이에 무작정 찾아가 7년동안 판소리의 기초를 닦고 한학과 인격 공부에 매달렸던 곳은 지금은 집터만 남아 있는 전남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 고 송계 정응민선생의 집이다.동편제 서편제와 함께 판소리 세 유파의 하나인 강산제의 고장 보성.힘차고 장중한 동편제와 애절하면서도 기교가 넘치는 서편제의장점을 두루 취한 강산제는 보성의 강산마을에 정착했던 어전명창 박유전에 의해 창제됐다. 박유전이 경회루 낙성식에서 한 소리를 들은 대원군이 '이 소리야말로 강산제일'이라고 칭찬한데서 「강산제」라는 명칭이 유래했다고전해진다.
1939년 보성군 겸백면 평호리 오호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강산제의 정한어린 노랫가락을 들으며 자랐다.초등학교를 졸업하던 51년 아버지를 졸라 당시 '남한에서 진짜 소리는 보성의 송계 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던정응민 선생을 찾아갔다.소리꾼이 되겠다는 소년에게 선생은 소리를 시켰고 나는 유성기 소리를 따라 배운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불러 제꼈다.'배우면 쓰겄다' 합격이었다.그길로 스승집에 기거하면서 7년동안 소리공부에 몰두했다.학교가는 시간 외에 하루 10시간 이상 소리공부를 하려면 잠은 두세시간이 고작이었다.선생의 명성을 듣고 소리를 배우러 찾아온 사람들은 집 주변에 자취방을 얻어 기거했는데 많을 때는 20여명을 헤아렸다.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아 심부름은 모두 내차지였다.어떤날은 10리길이 넘는 면소재지 율포까지 8번을 왕복한 적도 있다.하도날쌔게 심부름을 하곤 해서 개이름을 따 「세파또」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것이 나중 「세또」로 변했다. 내가 유일하게 스승과 한 방을 쓰며 지낸 것은 아마 나이가 어려무척이나 귀여워 하신 때문이었다.당시 옆집에 살던 분들의 기억에 의하면 『선생이 당신 입에서 알사탕을 꺼내 건네준 사람은 조상현 뿐이었다』고 할 정도로 사랑이 깊으셨다.하지만 허튼수작은 용납되지 않았다.잡가를 흥얼거리거나 굿을 보러나갔다 들키면 혹독한 꾸중과 함께 담뱃대나 북채로 얻어맞기 일쑤. 어린 나이에 야단을 맞고 집 뒤편 대나무 숲이나 마을 앞 정자나무 밑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수많은 소리꾼들이 북적거리던 이 마을은 지금 노인들 몇몇이 지난일을 들려줄 뿐 적막함 속에 싸여 있고 헐려 없어진 집터엔 잡초만 군데군데 돋아 있다.
집터 아래엔 지난 89년 뜻있는 지역인사들의 도움을 얻어 스승의 예적비를 세웠다. 내 어린시절의 추억들이 묻힌 곳.엄했지만 다정다감했던 스승과 함께 했던 기억으로 떠난지 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을 때마다 눈물바람을 일으키게 하는 곳.언젠가는 다시 예전처럼 집을 짓고 보성소리와 스승이 남긴 뜻을 이어가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약속하곤 한다.〈조상현·국악인〉 ◎조상현 누구인가/‘국악 대중화’에 앞장선 명창 【보성=김성현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조상현(58·광주시립국극단장·판소리 심청가 기능보유)씨. 만 47년을 소리꾼 외길을 걸어온 그는 보성소리(강산제)의 맥을 이은 당대의 명창이다. 12세때인 51년 송계 정응민의 문하에 들어가 7년동안 사사, 보성소리인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를 떼었다.20세때 광주로 나가 호남국악원의 조교로 있으면서 박봉술씨에게 적벽가를 배웠다. 군을 제대한 64년엔 다시 전남 목포에 정착, 목포국악원 판소리사범을 지냈다. 70년 마지막 스승인 명창 박녹주의 눈에 띄어 그녀의 수양아들로 들어가면서 서울로 근거지를 옮기고 다시 3년동안 흥보가를 이수, 판소리 다섯마당을 섭렵했다. 상경 1년만에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12년동안 수십편의 창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74년 무렵 동양방송 TV 출연을 계기로 전국적인 명성과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한시대를 풍미한다. 그는 방송출연을 하면서도 73년에 설립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통해 국악 대중화에 앞장서왔다. 지금도 매주 토요일이면 판소리강좌를 연다. 그래서 「국악을 대중 가까이로 끌어온 개척자」라고 불린다. 요즘 그는 매주 4일은 광주에서 3일은 서울에서 보낸다. 광주시 립국극단은 그의 열정에 힘입어 춘향전 심청전등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송계 가옥의 내력/강산제의 고향… 판소리의 ‘본가’ 보성=김성현 기자】 명창 조상현의 몸과 소리의 잔뼈가 굵은 곳. 전남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 이중에서도 아랫도강 한가운데 자리잡은 송계 정응민의 집은 보성소리의 본가다. 송계는 7살 나던 해 백부 정재근의 손에 이끌려 강산제의 창시자 인강산 박유전에게 갔고 강산은 그를 데리고 한양으로 간다. 20 세가 되기까지 대원군의 사랑채에서 소리를 연마하던 송계는 한일합방 후 스승인 강산이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끊자 낙향, 이곳 도강마을에 정착한다. 송계는 이곳에서 순수 판소리의 법제를 지키며 평생을 제자 기르기에 바쳤다. 현존 국악인의 절대다수가 보성소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우리 판소리의 고향인 셈. 실제로 보성소리를 거치지 않은 소리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조상현씨를 비롯, 박춘성 정광수 김준섭 성우향 성창순 조통달 안채봉 박농월 박순선 박기채 안행연 등이 송계의 문하를 드나들었고 임방울 같은 명창도 『2년만 송계형님에게 소리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다. 조상현씨는 『이들 대부분은 나이 들어 입문, 1∼3년 정도 공부 했다』며 『워낙 어려서 들어간 나는 나이는 적지만 입문시기로 따지면 이들보다 선배인 셈』이라고 말했다. 마을은 한밤중까지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분위기가 그러하니 동네사람들도 웬만한 소리를 들으면 『쓰겄다, 못쓰겄다』 분별할 정도였다고 마을 노인들은 회고했다. 송계의 집은 주인이 세상을 떠난지 3년만인 67년 헐렸다. 집 뒤편의 대나무숲도 없어지고 그 자리엔 송계의 묘가 이장돼 있다.지금 이곳엔 집 서편의 큰 바위와 조상현씨가 기거하던 방 마루앞에서 있던 한그루 동백나무만이 화려했던 보성소리 명가의 내력을 머금고 있다.(자료출처/조선일보)
'전통지킴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명 - 여성타악그룹 동천 (0) | 2006.06.02 |
---|---|
[스크랩] 다인의 참 멋 - 함허다례원 김명자 원장 (0) | 2006.06.02 |
[스크랩] 여인의 정절을 지켜오는 장도장 이연규 (0) | 2006.06.02 |
[스크랩] 금과 들노래보존회 김봉길회장 (0) | 2006.06.02 |
[스크랩] 천연 염색장 윤병운옹 (0) | 2006.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