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토(焦土)의 시>
1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 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는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少女)의 미소엔 앞이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15
--휴전 협상 때--
조국아, 심 청이 마냥 불쌍하기만 한 너로구나
시인이 너의 이름을 부르량이면
목이 멘다.
저기 모두 세기의 백정(白丁)들, 도마 위에 오른
고기마냥 너를 난도질하려는데
하늘은 왜 이다지도 무심만 하다더냐
조국아, 거리엔 희망도 절망도 못하는
백성들이 나날이 환장만 해 가고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은 불장마를 키질하는데
너는 생각하며 쓰러져 가는 갈대더냐
원혼(怨魂)의 나라 조국아,
너를 이제까지 지켜온 것은 모두
비명(非命)뿐이었지
여기 또다시 너의 마지막 맥박인 듯
어리고 헐벗은 형제들만이 북으로
발을 구르는데
저들의 넋을 풀어 줄 노래 하나
없구나
조국아! 심 청이마냥 불쌍하기만 한
조국아.
*1956년에 간행된 시집의 제명시. 전 15편 중의 일부이다.
작품의 현장은 62.5동란, 인족적 비극에서 비롯된 가지가지 부조리와 비극적인 상황을 "초토"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적 현실이 비극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극하는 의지와 기원으로 바탕되고 있는 것이다.
<강>
1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ㅣ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 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 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2
산들이 검은 장삼을 걸치고
다가 앉는다.
기도소의 침묵이 흐른다.
초록의 강물결이
능금빛으로 물들었다가
금은으로 수를 놓다가
설원(雪原)이 되었다가
이 또한 검은 망사(網絲)를 쓴다.
강 건너 마을은
제단같이
향연(香煙)이 피어 오르고
나루터에서
호롱을 현 조각배를 타고
외론 혼이 저어 나간다.
3
강이 숨을 죽이고 있다.
기름을 부어 놓은
유순(柔順)이 흐른다.
닦아 놓은 거울 속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마냥 깊다.
선정(禪定)에 든 강에서
나도 안으로 환해지며
화평을 얻는다.
4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도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의 밑뿌리부터가
흔들려 온다.
무상(無常)도 우리를 울리지만
안온(安穩)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게
이미 파문이듯이
가응ㄴ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6
강에 은현(銀絃)의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물에 번지면서
발레리나가 무대 인사를 하듯
다시 튀어 올라 광채를 짓고
저 큰 흐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강은 이제 박수소리를 낸다.
10
저 산골짜기 이 산 골짜기에다
육신의 허물을 벗어
흙 한 줌으로 남겨 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渴願)과 오열(嗚咽)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작은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자놈의
무심한 눈빛과무주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
또다시 내가 찬미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1969년도 작품.전 10편의 연작시,.
구 상의 시가 주로 현실에 바탕을 두어 온 반면 이 작품은 이례적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려진 것은 현실적 역사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연으 일부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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