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초토의 시............구 상

바보처럼1 2006. 11. 7. 19:11

<초토(焦土)의 시>

 

1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 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는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少女)의 미소엔 앞이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15

--휴전 협상 때--

조국아, 심 청이 마냥 불쌍하기만 한 너로구나

 

시인이 너의 이름을 부르량이면

목이 멘다.

 

저기 모두 세기의 백정(白丁)들, 도마 위에 오른

고기마냥 너를 난도질하려는데

하늘은 왜 이다지도 무심만 하다더냐

 

조국아, 거리엔 희망도 절망도 못하는

백성들이 나날이 환장만 해 가고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은 불장마를 키질하는데

 

너는 생각하며 쓰러져 가는 갈대더냐

원혼(怨魂)의 나라 조국아,

너를 이제까지 지켜온 것은 모두

비명(非命)뿐이었지

 

여기 또다시 너의 마지막 맥박인 듯

어리고 헐벗은 형제들만이 북으로

발을 구르는데

 

저들의 넋을 풀어 줄 노래 하나

없구나

조국아! 심 청이마냥 불쌍하기만 한

조국아.

 

*1956년에 간행된 시집의 제명시. 전 15편 중의 일부이다.

작품의 현장은 62.5동란, 인족적 비극에서 비롯된 가지가지 부조리와 비극적인 상황을 "초토"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적 현실이 비극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극하는 의지와 기원으로 바탕되고 있는 것이다.

 

 

<강>

 

 1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ㅣ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 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 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2

산들이 검은 장삼을 걸치고

다가 앉는다.

기도소의 침묵이 흐른다.

 

초록의 강물결이

능금빛으로 물들었다가

금은으로 수를 놓다가

설원(雪原)이 되었다가

이 또한 검은 망사(網絲)를 쓴다.

 

강 건너 마을은

제단같이

향연(香煙)이 피어 오르고

 

나루터에서

호롱을 현 조각배를 타고

외론 혼이 저어 나간다.

 

3

강이 숨을 죽이고 있다.

기름을 부어 놓은

유순(柔順)이 흐른다.

 

닦아 놓은 거울 속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마냥 깊다.

 

선정(禪定)에 든 강에서

나도 안으로 환해지며

화평을 얻는다.

 

4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도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의 밑뿌리부터가

흔들려 온다.

 

무상(無常)도 우리를 울리지만

안온(安穩)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게

이미 파문이듯이

가응ㄴ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6

강에 은현(銀絃)의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물에 번지면서

발레리나가 무대 인사를 하듯

다시 튀어 올라 광채를 짓고

저 큰 흐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강은 이제 박수소리를 낸다.

 

10

저 산골짜기 이 산 골짜기에다

육신의 허물을 벗어

흙 한 줌으로 남겨 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渴願)과 오열(嗚咽)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작은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자놈의

무심한 눈빛과무주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

또다시 내가 찬미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1969년도 작품.전 10편의 연작시,.

구 상의 시가 주로 현실에 바탕을 두어 온 반면 이 작품은 이례적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려진 것은 현실적 역사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연으 일부로서의 인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