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임금 이부자리도 없고 수라상 반찬은 닭다리 하나뿐 2008-08-20 23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조선이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호칭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지.. 역사 2008.09.18
(83)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서울신문 홈 > 기획/연재 > 아픈역사에서 배운다 : 병자호란 다시읽기 글자크기조정 --> [병자호란 다시 읽기](83)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조선 사신들 처음으로 홍타이지 ‘詔諭(조유:황제가 신료들에게 내리는 조서와 유시문)’에 네 번 절해 2008-08-06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 역사 2008.08.05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서울신문 홈 > 기획/연재 > 아픈역사에서 배운다 : 병자호란 다시읽기 글자크기조정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2008-07-30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포위된 이후 남한산성 사람들은 바깥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근왕병이 근처까.. 역사 2008.08.05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서울신문 홈 > 기획/연재 > 아픈역사에서 배운다 : 병자호란 다시읽기 글자크기조정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2008-07-23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 역사 2008.07.28
[병자호란 다시 읽기]<80> 근왕병이 패하다 Ⅰ 서울신문 홈 > 기획/연재 > 아픈역사에서 배운다 : 병자호란 다시읽기 글자크기조정 --> [병자호란 다시 읽기]<80> 근왕병이 패하다 Ⅰ 팔도 근왕병 속속 기치 들지만 중과부적에 한숨만… 2008-07-16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몇 차례 소소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 역사 2008.07.28
<72>일본 차문화의 명인 센노 리큐는 조선인 후손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2>일본 차문화의 명인 센노 리큐는 조선인 후손 "조선의 다완이 없었다면 日 茶道도 없었을 것이다" 관련이슈 :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 20080722002091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일본 차문화의 명인 센노 리.. 역사 2008.07.28
<71> 백제인 형제가 세운 도쿄의 명소 ‘센소지’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71> 백제인 형제가 세운 도쿄의 명소 ‘센소지’ ‘日 심장’에 고이 모셔진 ‘1치8푼의 秘佛’ 관련이슈 :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 20080708002212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백제인 형제가 세운 도쿄의 명소 ‘센.. 역사 2008.07.12
[병자호란 다시 읽기] (79) 남한산성의 나날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79) 남한산성의 나날들 Ⅲ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가 있은 직후 성안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여전히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류와 화친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결단은 쉽지 않았다.1636.. 역사 2008.07.12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枯死)시키.. 역사 2008.07.07
[병자호란 다시 읽기] (77) 남한산성의 나날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7) 남한산성의 나날들 Ⅰ 인조의 가짜 아우 인질로 보냈다가 더욱 궁지에…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건강이 여의치 않은데다 주요 길목을 청군이 모두 봉쇄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강화도 행을 시도하다가 청군에게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 역사 2008.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