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

가을날.........릴케

바보처럼1 2007. 4. 22. 14:28

<가을날>

     Autumm

 

주여, 시간이 되었읍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읍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 주옵소서.

 

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녘의 빛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무거워져가는 포도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에 없는 자는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살 것이며

잠자지 않고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바람에 나뭇잎이 구를 때면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사이를 헤맬 것입니다.

 

 

<봄엔지 꿈엔지>

       In Spring or Dream

 

봄엔지 꿈엔지

나는 언젠가 그대를 만난 일이 있어요.

한데 우리는 지금 가을 속을 함께 걷고 있지요.

그대는 내 손목을 꼭 쥐며 울고 있어요.

 

그대가 울고 있는 것은 몰려가는 구름 때문인 가요.

아니면 핏빛으로 물든 빨간 잎사귀 때문인 가요.

아마 그 때문은 아니겠지요.

나는 알고 있어요, 봄엔지 꿈엔지

한때 그대는 행복했던 몸...

 

 

<고 독>

       Loneliness

 

고독은 비와 같은 것.

저물녘 바다에서 올라와

먼 들판에서

언제나 고독한 허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드디어 도시에 내린다.

 

어둠이 깨어지려는 시각에 비는 내린다.

일체의 것이 아침으로 향하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육체와 육체가

실망과 슬픔으로 헤어져야 할 때

그리고 시샘하는 이들이

더불어 하나의 잠자리에 들 때

 

강물과 더불어 고독은 흐른다.

 

 

<사랑의 노래>

      Love Song

 

내 혼이 그대 혼에 이르지 않는다면

어찌 내 혼을 간직하랴.

그대 위에 있는 곳으로 어찌 내 혼을

밀어올릴 수 있으랴.

아 어둠 속에 잃은 것 그 옆에

그대의 속 마음이 흔들린다 해도

흔들이지 않을 그윽하고 외진 곳에

내 영혼을 두고 싶네.

그대와 내 몸에 스치는 것은 모두

마치 두 줄의 현(絃)에서 한 소리를 자아내는

바이얼린처럼 우리를 묶어 놓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악기가 있는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바이얼리스트가 있는지?

아 감미로운 노래여.

 

 

<황혼은 아득한 저쪽에서 온다>

     Gloming Comes frim far Away

 

황혼은 아득한 저쪽에서 온다.

눈 내린 조용한 숲을 지나

그리고 황혼은 그 겨울의 볼을

창문마다 밀어댄다. 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며

어느 집이나 모두 조용해진다.

노인들은 팔걸이 의자 속에서 생각에 잠기고

어머니들은 여왕님 같다.

아이들은 이제 놀기를 그만 두고

하녀들은 더 길쌈을 하지 않는다.

황혼의 집 속을 살펴보고

집 속에선 모두들 바깥을 살피고 있다.

 

 

<소녀의 기도>

      A Girl's Praying

 

보십시요, 우리들의 날은 이렇게 짧고

밤의 방은 근심스럽습니다.

우리들은 기다림에 지쳐

붉은 장미를 바라보고 있읍니다.

 

마리아, 당신은 우리에게 정답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당신의 피에서 꽃 피었읍니다.

그리고 그리움이 얼마나 마음 아픈 것인가를

당신만이 알 수 있읍니다.

 

소녀의 혼의 아픔을

당신은 스스로 알고 계십니다.

영혼은 크리스마스 밤에 내리는 눈처럼 느기면서

온통 불타고 있읍니다...

 

 

<사랑이 어떻게>

      How Love Come to You

 

사랑이 어떻게 네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祈禱)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내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내 가슴에 크게 걸려온 것을... .

 

 

<하이얀 국화가>

     White Chrysanthemum

 

하이얀 국화가 피어있는 날이었다.

그 짙은 화사함이 어쩐지 나를 불안케 했다.

그날 밤 늦게, 조용히 네가

내 마음에 닥아 왔다.

 

나는 불안했다. 아주 상냥히 네가 왔다.

그때 나는 너를 꿈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오고 그리고 은은히, 동화에서 처럼

밤이 울려퍼졌다.

 

 

<장미의 속>

     The Inside of Rose

 

어디에 이런 속을 감싸는

겉이 있을까. 어떤 상처에

이보드라운 아마포를 올려 놓은 걸까.

이 근심 모르는

활짝 핀 장미꽃 속의 호수에

어느 곳의 하늘이

비쳐있는지. 보라

장미는 이제 곧

누구 떨리는 손이 그를 뭉개버릴걸 모르는 양

꽃잎과 꽃잎을 서로 맞대고 있다.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 많은 꽃들은

너무도 가득 차

속에서 흘러 넘쳐

끝없는 여름날 속으로 흘러든다.

더욱 풍요로운 그날들이 문을 닫고

꿑내 온 여름이 하나의 방

꿈 속 방이 될 때까지.

 

 

<내 눈빛을 꺼주오>

      Let Me Die

 

내 눈빛을 꺼주오. 나 그대를 볼 수 있오.

내 귀를 막아 주오. 나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오.

걷지 않고서도 그대에게 갈 수 있으며

입이 없어도 그대에게 맹세할 수 있오.

내 팔을 꺾어 주오. 그러면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그대를 잡을 수 있오.

내 심장을 닦아 주오. 그러면 내 뇌가 뛰겠지요.

뇌 속에 그대 만일 불을 던진다면

내 피 속에서 당신을 살라버릴 것이오.

 

 

<꿈의 노래>

       The Song within a Dream

 

이 노란 장미꽃은

어제 그 소년이 내게 준 것이다.

오늘 나는 이 장미꽃을

그 소년의 새 무덤으로 가지고 간다.

조그만 물방울이 장미꽃 잎 그늘에

아직도 방울져 빛난다... 보라

오늘은 그것마저 눈물이다.

어제는 아침 이슬이던 것이...

 

 

<그대의 정원이 되어>

      I've became Your Garden

 

처음, 저는 그대의 정원이 되어

덩굴과 꽃밭을 가꾸고 싶었어요.

아름다운 그대 모습을 그늘로 가리고

어머님같이 미소지으며 자주

그대 돌아 오시게 하기 위하여

그러나 그대 오가실 때

무언가 함께 따라 들어와

그대가 하얀 꽃밭에서 저를 부르실 때마다

저를 붉은 꽃밭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가 을>

      Autumn

 

끝없이 나뭇잎이 진다. 멀리서 내려 오듯이

하늘의 넓은 정원이 시들어 가듯이

거부(拒否)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중에 무거운 지구가

모든 별들을 떠나 고독속에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도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이 모든 떨어짐을

무한히 부드러운 손으로 받쳐 주고있다.

 

 

<마리아>

       Maria

 

마리아.

당신의 우심을 저는 알고 있읍니다.

저도 또한 울고 싶읍니다.

당신을 위하여

이마를 돌 위에 대고

울고 싶습니다...

 

당신의 두 손은 뜨겁습니다.

그 밑에 내 손을 밀어 넣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노래 하나 남으련만.

 

그러나 시간은 죽는 것, 유언도 없이...

 

 

<신 부(新婦)>

         Bride

 

불러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크게 나를 불러 주세요.

그대의 신부를 오랫동안 창가에 서 있게 하지 마세요.

늙은 프라타나스의 가로수 길에서

저녁은 이미 잠들었어요.

그리고 그대가 와서 저를 불러

집 안에 가두어 두지 않으면

나는 나의 두 손에서 나와

어둑한 정원 속에

나 스스로 스며 가야겠읍니다.

 

 

*릴케(Reiner Maria Rilke, 1875-1926); 20세기 최대의 독일 시인.로당의 비서로 있으며 시에 정진.부친의 권으로 사관학교에 입학, 중도 퇴학후 프랑스,이태리,러시아 등지를 방랑.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 감상적 서정시<형상 시집>, 소설<말테의 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