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양평 첩첩산중에 사는 소설가 이윤기씨

바보처럼1 2007. 7. 10. 21:31
[전원속의 작가들]양평 첩첩산중에 사는 소설가 이윤기씨
모든 문명은 '신화'가 모태
그 '영혼'을 찾아 산속으로
"30대엔 경험을 쓰고, 40대땐 재해석"
"50대는 상상력이 다른 상상력을 점화"

한 시간이면 족히 도착할 것이라는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마치 바리데기공주가 아버지를 살릴 약물을 구하러 가는 구만리 저승길처럼 막히고 막히고 또 막혔다. 하필 인터뷰 약속 잡은 날이 일요일이기도 했지만, 당대 최고의 번역작가 겸 소설가를 만나는 게 만만찮은 ‘행운’이라도 되듯 교통사고까지 나 두어 시간 족히 미사리조정경기장 옆 길거리에서 탕진했다. 우여곡절 끝에 팔당대교를 통과했으나 그곳에서 다시 50여나 더 가고, 또 꾸부정하고 울퉁불퉁한 시골 농로와 마을 안길을 통과해서야 ‘무릉’은 기자에게 발디딜 틈을 내주었다.

소설가 이윤기(李潤基·56)씨가 마련한 전원 속 집필실 가는 길은 이렇게 멀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이지만 강원도에 가까워 주민들은 ‘경강도’라 부른다.

입구엔 15채쯤 되는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뒤쪽은 어림잡아 해발 500m쯤 되는 울울한 산이 버티고 있었다. 집 사방은 목련 느티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구상나무 메타세콰이어 등 그가 심었다는 1000여 그루의 나무들이 에워쌌다. 사대부집 봉당만한 작은 연못과 집필실 옆을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천도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카우보이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손을 들어 인사하는 작가는 평범한 농부의 행색이었다. 마침 동네 주민들과 나무에 버팀목을 매어주던 중이라 차림 그대로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아무 곳에 렌즈를 들이대도 ‘그림엽서’가 나온다며 신바람이 났다.

―주민들하곤 잘 어울리나요?

“동네 인심 못 얻으면 못 살지요.”

우문현답이다. 쌀과 콩도 동네 주민이 지은 것으로 사먹고, 틈틈이 주민들과 막걸리를 나눈다고. 책꽂이로 쓰던 나무상자 세개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긴 널빤지를 얻으니 그럴 듯한 밥상이다. 삼겹살에 깻잎 몇장 얹어놓은 소찬이지만 꿀맛이다.

―과천 자택도 괜찮을 텐데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이곳에선 하루에도 여러번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해야 합니다. 헬스 골프 등 별다른 운동도 못하는 입장에서 많이 걷고 땅도 파고 하는 게 건강에 좋네요.”

집 뒤편엘 보니 아닌게아니라 땅콩 고추 고구마 감자 토마토 등을 심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집필 중인 작품 있나요?

“신화 책은 계속 쓰지요. 장편은 잘 안 됩니다. 중·단편 체질인가봐요. 1년에 단편집 한권은 내고 싶은데, 문예지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런지 원고청탁이 뜸하네요. 청탁이 들어와야 그나마 쓰는데…. 특별히 준비하는 것은 ‘셰익스피어’ 전작을 번역하는 일입니다. 최근 딸과 함께 공동작업을 시작했어요.”

신화를 모르고 한 번역은 진정한 ‘셰익스피어’라 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엔 서기까지 어려 있었다.

―좋은 일이 있나요?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그리스 신화’가 24쪽이나 실린다네요. 그리스 신화 붐을 보면서 언젠가 커리큘럼에 변화가 오리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영광이지요.”

―왜 굳이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된나요?

“토마스 만이 그랬지요. 시에 관심 가진 인간은 심리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고, 심리에 관심을 가진 인간은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시심은 곧 심리와 신화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문명 속에 살지만, 실은 인류문명사에서 보면 하루도 안 되는 미미한 찰라입니다. 더구나 신화의 나이가 백살, 천살이라면 문학의 나이는 그나마 한살배기도 안 됩니다. ”

―이윤기식 문학의 근원은 어디에 있나요?

“독서라고 하겠지요. 취학 전에 한문을 좀 배워 한문으로 씌어진 읽을거리와 한글로 된 딱지본 소설을 여러권 읽었습니다. 만화도 광적으로 탐독했고요. 중학교 1학년 때는 부잣집에 꼬마 가정교사로 들어가 각각 100권씩인 세계명작전집·위인전집을 다 읽었고, 학생문고전집도 모조리 독파했지요. 일본어도 배워 일본 소설도 애독했고, 영어 원서는 지금도 손에서 뗄 날이 없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권을 다 씹어먹었다는 일화의 사실 여부는 차마 묻지 않았다.

―그 정도 썼으면 소재가 떨어질 만할 텐데….

“30대는 경험을 쓰고, 40대엔 경험을 재해석합니다. 50대는 상상력이 다른 상상력을 점화시키는 시기라고 봅니다. ‘역사’는 좋은 비상구겠지요.

지금도 하루 10시간 이상 남의 글을 읽지만 점점 힘이 드네요. 눈이 피로해 고통스럽습니다. 이곳은 집필실이라기보다는 쉼터에 가깝죠.”

그러면서 예로부터 글 읽는 선비는 좋은 풍경이 눈에 못 들어오게 북향집에서 살았다고 설명한다. 화가인 부인이 이해를 돕는다. “이이는 컴컴한 방에서만 글을 씁니다.”

양평=조정진기자/jjj@segye.com

<사진>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전원에 묻혀 신화를 다시 조탁하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작가 이윤기씨. 그는 “소설은 숨은그림을 찾아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숨은그림을 담아두는 것이어야 한다”며 “우리 한번, 흐릅시다(술 한잔 같이 하잔 뜻)”고 붙잡는다. /이제원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