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노동시를 쓰고 있는 박영근(45) 시인을 인천시 부평구청 인근 ‘신트리공원’에서 만났다. 공원 내 구멍가게에서 4시간, 커피숍에서 2시간, 순대국밥집에서 2시간을 더 이야기한 뒤에야 시인은 누추하다며 공개를 꺼리던 자택으로 안내했다. 자택이라고 할 것도 없는 판잣집, 아니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허름한 움막이었다. 고층아파트가 하늘을 찌르는 도심 한 가운데 마치 버려진 농가주택 같은 시인의 집에서 시인과 기자는 몇 시간을 더 이야기했다.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흰 빛’). “너 아직도 노동시 쓰냐”는 말은 제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질문입니다. 큰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라는 판에 ‘아직도’ 운운한다는 것은 참혹한 능멸이지요. ‘너 요즘도 숨 쉬느냐’는 질문과 뭐가 다르겠어요. 여전히 1000만 노동자가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박 시인이 부평에 자리잡은 것은 벌써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공한 문인처럼 팔자가 좋아 ‘전원’에 집필실을 마련한 것이 아니다. 박 시인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일터’인 공장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굴러 부평공단으로 옮겨온 것이다. 번듯한 책상 하나 갖추지 못한 시인의 방은 각종 문예지와 시집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고, 방구석엔 먹다만 김 몇 조각과 반쯤 든 소주병이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지금도 꿈꾸는가/ 빗물에 젖는 공장 담벼락/ 패인 낙서 속/ 희미한 얼굴/…/그 노래가 들리는가/ 제 가슴의 피와 땀을 퍼올리던/ 포크레인/ 제 슬픔의 밑바닥까지 파헤치던 삽날/ 쇳가루에 썩어가던 작업복도/ 눈부셔라/…/ 삼십 년 기름때 먼지밥에 늙어온 노동이/ 오직 자신의 사상으로 타올라/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오오 별빛이여”(‘그 눈동자’). 무수했던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다 떠난 자리에 거의 유일하게 현장에 남아 ‘노동자’로 살아가는 박 시인. 최근 한 행사에 정장 차림으로 참가해 달라는 주최측의 요구를 받고 넥타이가 없어 고민하는 그는 천상 노동자 시인이다. 그는 해방 직후 북으로 간 안용만 시인에 이어 우리나라 노동시인의 원조이다. 1981년 시동인지 ‘반시(反詩)’에 ‘수유리에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 시인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오기 1년 전에 이미 첫 노동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1984)를 펴냈다. 70년대 말 고교 1년을 중퇴하고 무작정 상경, 서울 양천구 신정동 뚝방촌에 자리 잡은 시인은 당시 현장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던 ‘동일방직’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처음으로 노동현실과 시에 눈을 떴다. 월간 ‘대화’에 연재되던 석정남의 일기와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등이 스승이 되어 주었다. 첫 시집에 실린 ‘새벽길’은 77년에 씌어졌고, ‘수유리에서’도 군 입대 전에 쓴 것이다. “현장에 들어가서 노동의 주체로서 살아보자”고 결심한 후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은 구로구 가리봉동 수출산업공단 내 ‘당산실업’이라는 제본소였다. ‘성경’을 인쇄하던 곳이다. 그 후 난로를 만들던 ‘기양전자’를 비롯해 인천의 가구공장 등 지금 사는 부평공단까지 줄잡아 20여 군데를 전전했다. 생계 도모도 중요했다. “먹고 살고자 하는 노동이라 고달팠지만 귀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남들보다 오랫동안 노동 시를 쓸 수 있는 근원도 현장에 있습니다. ‘노동해방문학’ 같은 거창한 것엔 별로 관심 없습니다. ‘노동자 정권’을 만들려는 전투적 노동운동도 현장의 정서와 너무도 괴리된 구호였습니다. ‘민중은 건강하고, 노동자는 혁명의 동력’이라고 했지만, 실제 노동자 중에는 돈 빌려가 떼먹는 뺀질이도 많습니다. ‘학출’들은 노동자들을 운동의 대상으로만 삼으려했지 진정한 동료로서 대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운동가들이 현장에서 ‘상처’만 받고 떠난 배경이지요.” 그가 왜 ‘아직도’ 현장에 있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특히 80년대는 너무 사람을 귀하게 취급하지 않았다고 질타한다. “한 공단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들은 의리와 인정, 공동체적 유대감 등 나름의 ‘속살’이 있습니다. 아무리 삭막한 공단이지만 대부분이 농촌 출신인 그들에겐 ‘농심’이 배어 있습니다. 인간관계나 문제를 푸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그래서 획일화를 싫어한다. “노래엔 젖은 눈동자 남아/ 적시네 남은 생애를/ 어디서 솟은지 몰라/ 눈물샘 마르지 않네 노래엔/ 젖은 눈동자 남아/ 적시네 남은 멸망과/ 그 이후의 더 진한 눈물까지…”(‘젖은 눈동자’). 꿈이 사라져버린 90년대 부평에 홀로 남은 시인은 괴로워 했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대치선 위에서 떨고 있다”(‘길’)고 외치기까지 했다. 시인은 그러나 억지로 전망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새삼스럽게 시를 과학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도 철 지난 편향일 따름이라고 본다. 그것은 시인의 몫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그는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앞으로는 시적 통찰력이 담긴, 예술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부평은 이런 시인의 마음을 담기엔 안성맞춤이다. 작금의 노동계와 정부의 대치국면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자발적 동의’를 거치지 않는 변혁은 모두 허위”라고 단정한다. 아직도 시인의 할일이 남은 세상이 야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글 조정진, 사진 이제원기자/jjj@segye.com ■연보 ▲전북 부안 출생(1958년) ▲1970년대 후반부터 구로공단, 부평 등 20여곳서 공장 노동자 생활 ▲‘내일을 여는 작가’(민족문학작가회의) ‘창작과비평’ ‘실천문학’에 시평 연재, 계간 ‘시평’ 기획위원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1984) ‘대열’(1987) ‘김미순전’(1993)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저 꽃이 불편하다’(2002)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1994), 제5회 백석문학상(2003) 수상
<사진>문학과 예술의 힘을 신뢰한다는 박영근 시인. 시인은 정신의 힘으로 설득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하며, 어디에 존재하든 진실을 노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2003.12.01 (월) 1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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