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구두쇠’라고 자칭하는 작가는 애초 야외작업실을 생각도 못했다. 처음 이곳에 와 보고 ‘차 한 잔에 음악이 어울리는 공간’이란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그는 강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철저한 고독을 즐기기 위해서다. 괜스레 강 건너편 산에 마음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가엔 물오리와 원앙이 한가로이 떠다닌다. 작가는 이른 아침 작업실 창문을 새색시 다루듯 살며시 연다. 행여 그들의 세레나데에 훼방꾼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이곳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고독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은 거울 같아요” 학교가 파하면 무섭게 작가는 작업실로 달려온다. 풍경에만 의지하는 일반인들은 아마도 서너 시간만 지나도 적막강산에 견디지 못할 것만 같다. 때론 너무 사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강가를 따라 1시간 가까이 학교로 달리다 보면 뜻 모를 미운 감정들은 눈녹듯이 사라진다. 오늘 만나는 사람 모두를 사랑해야지 하고 다짐을 하게 만든다. 물안개라도 끼어 있으면 운치는 그만이다. 재즈와 올드 팝송의 선율이 흐르는 작업실 한가운데는 페치카가 온기를 내뿜고 있다. “자연은 저더러 작고 겸손하라 합니다.” 뾰쪽뾰족한 마음꼴도 매사 비판적인 모습도 사라졌다. 사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작가의 극사실적인 일상 풍경이 관조적으로 읽혀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전엔 화면 가득 뭘 그리 많은 얘기를 하려 했는지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림도 허허로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다 보여주는 것보다 걸러내고 빈곳이 있어야 좋은 것 아니냐는 반문 같다. “일상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존재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유한한 삶과 사회의 욕망을 대변하는 화면 속 시계와 의자들이 그렇다. 자연에는 시간 개념이 없지 않은가. 말과 목련, 강아지 양귀비꽂 등이 한 화면에 놓여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뭔가 느낌이 전해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람자는 그 엇박자의 틈새 공간에서 시적 언어를 건져올리려 할 것입니다.” 거창한 철학은 없지만 마음 깊숙한 울림이 있다. 세잔이 사과를 그릴 때처럼. 화면 가득 초현실적인 환상과 문학성이 물씬 풍기는 이유도 알 만하다. 작가들은 대분분 최신 유행을 벗어나면 불안감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현대병’을 앓는다. 그도 한때는 번민했다. 컴퓨터 시대에 붓을 들고 열심히 그리는 것이 시대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리는 과정을 즐기게 되면서 극복을 했습니다. 붓질의 참맛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 맛이 디지털로 이룰 수 없는 회화적인 ‘맛 ’이라는 것이다. 아날로그가 인간 감성에 더 어울린다는 얘기다. 작업실 안으로 진돗개 두 마리가 들어와 작가 곁에 앉는다. 석이와 진이다. “석이는 저를 7년간 지켜준 수호신이지요.” 처음 작업실에 내려와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선물받은 것이 석이다. 남매였지만 암컷이 기차에 치여 죽었다. “어느 날 석이의 눈빛에서 우수를 발견하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지금의 진이를 성급히 데리고 왔다. 생명을 알게 한 것도 바로 이들이다. 순수를 개의 눈을 통해 배운 것이다. “좋아하던 낚시도 더 이상 못하겠더라고요.” 물가에 있으면서도 낚시를 접은 지도 오래됐다. 마치 꽃병에 꽂혀 있는 일반적인 꽃과 작가의 화면 속 꽃이 다른 이미지이듯, 자연에 던져진 작가는 지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요즘 명상 관련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고 한다.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맞은편 산을 면벽 삼아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나이 탓인가 봐요 왜 이러지요”라면서 화분 속 꽃벌레를 손으로 잡아 바깥 풀섶에 놔준다. 예전 같으면 잡아 죽였을 텐데.
한국 현대연극의 선구자인 이해랑씨가 그의 부친이다. “배고푼 예술을 아시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자식의 미래를 얼마나 고심했었을까. 작가는 외동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화업을 이으면서 이제야 부모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3대가 예술의 길을 가게 된 셈이지요.” 작가의 술잔 너머로 강이 흐른다. 누구에게나 지나온 삶과 지낼 삶을 묵묵히 비춰주고 있는 강. 사람들은 떠난다. 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러. 전화벨이 울린다. 밑반찬을 챙겨 오겠다는 안방마님의 기별이다. “여기 있으면서 아내가 그렇게 반가워질 줄을 몰랐어요.” 만면에 함박웃음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철길에 연이은 강변을 걷는다. 작가는 말했다. 강이 불러도 산만을 보고 살겠다고. 편완식기자/wansik@segye.com
<사진>끝없는 붓질 과정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는 작가는 작업실 테라스에 서서 강너머 산을 망연히 바라봤다(위).이종렬기자 작가가 그린 작업실 풍경 |
2003.12.08 (월) 1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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