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용인-천안 오가며 집필 소설가 송기원씨

바보처럼1 2007. 7. 10. 21:37
 
[전원속의 작가들]용인-천안 오가며 집필 소설가 송기원씨
"이념 아닌 삶만을 쓰겠다"
“이데올로기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군사정권은 민중문학의 훌륭한 표적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타깃이 없어졌습니다. 이럴 때 자칫하면 이념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웃들의 삶을 따뜻하게 해주는 글을 써야 합니다. 나는 이제 글만 쓰며 살고 싶습니다.”

누가, 왜, 상처 많은 한 작가의 글쓰기를 방해했을까. 한 많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장터 건달로 살다 경기 화성군 팔탄면에서, 서울 변두리인 고덕동과 상계동에서, 히말라야를 품은 인도와 티베트를 거쳐 충남 계룡산 토굴에서, 다시 전북 고창의 바닷가와 경기 분당을 거쳐 용인으로, 이젠 충남 천안의 한 개울가까지 그의 육신을 옮겨다니게 했을까.

왜 평생 간직할 학창시절 졸업앨범에서 자신의 사진을 면도칼로 오려내야 했을까. 하필이면 5년마다 옥살이를 네 번씩이나 했을까. 그것도 정치·사상범으로.

그는 왜 아버지가 처음부터 없었으며, 어머니는 스스로 방문고리에 목을 맸을까. 대학시절 은사였던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왜 또 “저 놈과는 차도 마시지 말고, 밥도 먹지 말라”고 엄명을 했을까.

이쯤 되면 인간 송기원(宋基元·56)의 인상은 수염이 텁수룩한 기인이거나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용인시 구성면 자택에서 만난 작가의 첫인상은 해맑은 소년이었다. 아니, 수십년간 도를 닦은 큰스님의 미소 같은 해탈의 기운이 얼굴 가득 배어 있었다.

도무지 ‘내란’ 음모자로 구속됐었다는 이력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는 한때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낸 출판기획자이기도 했고, 74년엔 두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된 촉망받는 문인이기도 했다.

“이제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안 할 생각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게 소설이니까요. 내가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이야기를 담은 연작소설 ‘사람의 향기’로 최근 대산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수줍게 고백한 말이다. �까, 다시 물었다.

“아편쟁이에 숱한 사고뭉치였던 생부가 죽도록 싫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비 없는 사생아로 살아왔는데…, 그랬던 생부가 어느 날부터 차츰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생부가 죽을 때까지 얼굴을 몰랐으며 어머니로부터 매우 부정적인 이야기만 들어왔는데, 30대 중반이 돼 어느 날 보니 생부가 했다는 일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더군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때부터 생부가 예뻐지기 시작했습니다. ”

그는 몇 편의 가족사를 다룬 작품을 통해 이미 과거와 화해했다. 아니, 자신을 사생아로 만든 생부와 마귀만 같았던 의부 등 모든 악연들을 용서하고 하나로 융합됐다. 그는 이를 “‘나’라는 미신에서 빠져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한 결과”라며 “이제야 비로소 불행한 가족사와 고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자평한다.

그가 이렇게 ‘득도’의 경지에 오른 데는 90년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씨의 권유로 입문한 국선도와 무관하지 않다. 히말라야산맥을 오르내린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계룡산 토굴에 똬리를 틀고 1년 이상 수련, 엄지 하나로 물구나무를 설 정도까지 기가 올랐던 때도, 머리카락을 박박 깎은 것도 이 즈음이다. 장편 ‘청산’은 바로 국선도의 창시자 청산거사의 수련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도피한 건 결코 아니다. “80년대까진 권력과의 투쟁만 좋게 봤지만, 이젠 인간의 문제를 더 크게 보려 한다”는 다짐처럼, 영혼의 빈곤이나 정신의 결핍을 치유할 수 있는 정신혁명을 자신의 문학에 담고 싶었던 것이다.

안성에 있는 중앙대 문예창작과 출강으로 가족들을 용인에 남겨놓은 작가는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충남 천안시 성거읍 저리의 ‘조원’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지낸다. 벌써 4년째다.

아파트 앞 개울가에 버려진 자투리 땅을 일궈 쑥갓이며 아욱 상추 배추 열무 등을 길러 먹는다. 인근 진천과 병천의 시끌벅적한 5일장을 둘러보는 것도 작가의 중요한 소일거리다.

장은 사람과 물건이 넘쳐나는 가장 생기나는 곳이기에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기에도, 새로운 작품 구상에도 안성맞춤인 셈이다.

글 조정진기자, 사진 이제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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