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양평 첩첩산중에 새둥지 소설가 김성동씨

바보처럼1 2007. 7. 10. 21:46
[전원속의 작가들]양평 첩첩산중에 새둥지 소설가 김성동씨
"한국전쟁때 처형당한 아버지 내삶은 처절한 그리움이였다"
큰 길에서 작은 길로, 다시 더 좁고 언덕진 곳으로…. 그의 처소에 오르는 길은 작심하고 입산하려는 불자가 아니면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고난도의 비탈길이었다. 채 녹지 않은 눈길에 차 바퀴는 연신 겉돌기만 하다가 뒤로 밀린다. 여차하면 족히 50m쯤은 돼 보이는 낭떠러지로 구를 것만 같아 차를 포기했다. 손을 잡아 서로 의지한 채 달빛에 길 밝혀 오르고 또 오르니 단아한 그의 거처 겸 집필실 ‘비사난야(非寺蘭若·절 아닌 절)’가 떡 버티고 있었다.

24년 동안 ‘만다라’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김성동(金聖東·56)씨. 1978년 ‘만다라’를 통해 세상에 던진 ‘병 속의 새’ 화두를 안고 이산 저산으로, 충북 보령에서 서울로, 김해로, 다시 강원 백담사와 평창을 거쳐 경기 남양주에서 숨어다니던 그가 이번엔 아주 눌러앉을 요량으로 경기 양평군 청운면 가현리 깊은 산중에 새 둥지를 틀었다.

“승적 박탈당한 승려가 거하는 곳이니 ‘절 아닌 절’이지요.”

전깃불은 어렵사리 끌어왔지만, 전화선은 여전히 이어지지 않았다. 모 통신회사가 안테나를 설치해줘 휴대전화만은 겨우 터진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으로 나가려면 2박3일은 고민해야 한다. 이게, 그냥 좋단다. 마음 약한 기자한테도 자꾸 조른다. 눌러앉으라고….

“프로 기사가 되려다가 실패해서 중이 되었고, 끝내는 중도 되지 못해 소설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문학인생은 낭만적인 문학소년의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다. 태어난 이듬해인 48년, 장총 멘 순사한테 끌려간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 곧은 한학자로 전국농민조합총동맹 충남지부 대변인을 맡았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와중에 처형됐다. 큰 삼촌은 우익에 희생됐고, 외삼촌은 좌익에 학살당했다. 좌우 이데올로기에 졸지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돌멩이라도 깨물고 흙이라고 파먹고 싶을 만큼, 잠자리라도 잡아 구워먹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배고픔은 두 번째였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습니다.”

그가 끝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면 좇는 그리움의 대상은 늘 아버지였다. 그의 방엔 20대 때 찍은 아버지 사진을 비롯해 아버지가 쓰던 붓과 벼루, 퉁소 등이 아직도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기자에게 아버지 유품을 보여주던 그의 눈에 얼핏 눈물이 비쳤다.

“제 인생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인생은 승부인데, 이미 승패가 결론 난 상황에서 움직였으니 참 재미 없는 인생살이지요.”

불교는 그의 탈출구이자, 종착역이다. 비록 고교 3학년 때 출가해 10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다 75년 ‘주간종교’에 당선된 단편소설 ‘목탁조’가 불교계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지만, 그는 여전히 ‘승려 아닌 승려’다. 불교 자랑도 끝이 없다.

“불교를 믿는 나라 치고 타 민족을 침략한 예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 우리나라 등 불교국가들은 모두 피침국들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지요. 깨달으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되지요.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하냐가 중요합니다. 율곡의 ‘신독(愼獨)’의 경지와 맞닿지요.”

깊은 밤 산중 문답은 어느새 현실로 돌아왔다. “예수나 마르크스주의는 모두 서구사상입니다. 서구의 눈으로 세계를 본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이 숨막히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자연생태계가 깨져 나가는 환경문제를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분명 위대한 사상가이지만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깨졌습니까. 나의 경우만 해도 3대가 깨졌습니다. 아버지가 깨지고, 내가 깨지고, 자식이 깨졌습니다. 모두 서구 시각의 한계입니다.”

그가 최근 느닷없이 ‘천자문(千字文)’을 들고 나온 이유이다.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라는 부제도 심상치 않다.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배운 ‘김성동 천자문’을 통해 그는 세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천자문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람 사는 세상에 두루 통용되는 율법입니다. 이데올로기에 자식을 잃은 할아버지는 ‘대저 책을 읽는 데서 모든 환란이 비롯되나니, 책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환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니라’ 하며 양서 대신 고서를 읽고 쓰게 했다. 어느 정도 읽고 쓰게 했는지 그가 다섯 살 때 필사한 ‘명심보감’은 마치 인쇄본 같이 정갈해 혀를 차게 했다.

할아버지는 조실부모한 어린 손자에 계명을 내렸다. “물이 아니면 돌이니 밤에는 흰 것을 밟지 마라.” 두드러진 것을 밟았다가는 곧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엄연한 현실을 어린아이는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비극이자, 가족사의 비극이자, 개인의 비극입니다.”

문학은 그의 또 하나의 탈출구였다. “문학은 죽은 역사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 자꾸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그에게 문학은 따로국밥처럼 문학 따로, 인생 따로가 아니다. 삶이 곧 문학이고, 문학이 곧 그의 삶이다. 더욱이 그처럼 뭔가 할 말이 많은, 아니 회복불능의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문학도로서 제격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듣게 된 산새 소리와 물 소리에 작심(作心)이 오른다”는 그는 이제 기억 속에 저장됐던 아름다운 우리말을 이용해 “숨을 쉬는 동안 본격적으로 글을 쓸 것”을 다짐한다.

글 조정진, 사진 이종덕기자/jjj@segye.com

■연보

▲1947년 충남 보령 출생 ▲1965년 서라벌고교 3학년 때 출가, 1976년 하산 ▲1975년 ‘주간종교’에 단편 ‘목탁조’ 당선, 1978년 중편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1998년 시인 등단 ▲장편 ‘만다라’ ‘집’ ‘길’ ‘국수(國手)’, 소설집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염소’ ‘꿈’, 산문집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 ‘생명기행’ ‘김성동 천자문’ 등 ▲신동엽창작기금(1985) 행원문화상(1998) 현대불교문학상(2001) 등 수상

<사진>사람 냄새가 그리워 다시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는 소설가 김성동씨. “일상생활에서 우러나는 삶의 욕구를 진실하고 생생하게 반영하는 것이 곧 예술”이라는 그는 “가족공동체를 떠나서는 삶 자체도 있을 수 없다”며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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