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녁골(경기 양평 서후2리) 화가 민정기(56). 산과 자갈밭과 다락논이 전부였던 이곳에 그가 둥지를 튼지도 벌써 열여섯 해. 용문산 자락이라 제법 골이 깊어 양수리에서 차로 산고개를 두번이나 꼬불꼬불 넘어 20여분 달려서야 겨우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음지쪽 도로엔 내린 눈이 얼어 빙판이다. 작업실 외벽엔 가지런히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영락없는 산골의 넉넉한 겨우살이 풍경이다. 작가는 그동안 여기서 무엇을 얻었을까. 1980년대 초 민중미술가그룹 ‘현실과 발언’ 동인이었고, 국내 화단에 첫 키치(kitsch·조잡한 방법으로 예술의 엄숙주의를 비웃는 표현방식) 미술을 소개하는 등 이슈 메이커였던 그가 87년 홀연히 서울을 떠났던 이유는 뭘까. “사람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터전으로서의 산수를 그리고 싶었어요.” 점심을 간단히 해결한 작가는 산 둔덕에 옹기종기 자리잡은 마을로 마실을 나선다. “동네 어르신네에게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 그 옆을 흐르고 있는 개울에 얽힌 이런 저런 얘기를 귀동냥하다 보면 자연이 아니라 ‘삶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본토박이들은 이제 그를 더 이상 외지인으로 생각지 않는다.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산신제에 초대될 만큼 그는 토박이가 다 됐다. 마을 사람들은 동녁골의 역사를 담은 ‘동녁지’까지 내보여 줄 정도. 그 속엔 이 땅을 기반으로 한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들쳐보면 삶의 깊이(역사)가 느껴진다. “주변환경 하나하나에 투영된 인간의 삶을 읽을 수 있지요.” 산수를 그리지만 결국 인간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동녁지’에 기록된 산수를 찾아다니다 보면 겉으로 보이는 정서뿐 아니라 심도 있는 사람 사는 모습(역사)을 발견하게 됩니다.” 농바위라는 이름에선 네모 반듯한 농을 겹쳐 쌓아올린 우리네 미감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이런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옛지도로 이어졌다. “집과 산수를 눈으로 보고 그린 고지도야말로 데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도와 실경을 합쳐 놓은 것이 옛 지도라는 얘기다. 그는 회회적 요소가 강한 고지도를 중요한 그림 자원으로 삼고 있다. 일점원근법에 얽매이지 않고 정면성(평면성과 수직성)과 다(多)시점을 과감히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산수화법을 유화 소재와 결합해 독특한 실경산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의 그림이 옛 지도를 닮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삶의 모습과 조형성이 유기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고지도 입니다.” 그는 겸재 정선과 김정호가 그랬듯이, 발품 파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지역 지형을 잘 아는 마을 이장은 물론 집배원에까지 그는 자문을 구한다. “고지도엔 산수에 들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풍수지리 등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인공위성을 이용해 만든 오늘날의 지도보다 삶의 터전이 더 실감나게 드러나 있습니다.” 삶의 공간이란 시각과 인간의 스케일로 본 자연이기에 그렇다. 그는 이제 도시를 그리고 싶다고 한다. “여주 이천 등 남한강을 따라 서울 외곽부터 시작해 도심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도시를 이해하고 그리기가 자연보다 더 어렵단다. 나룻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작업하고 싶은데 그것도 댐에 막혀 고심 중이다. 그는 산수와 고지도에서 인간과 생태환경을 배웠다. 그가 전원 속에 들어간 이유는 환경 파괴로 오염된 도시와 피폐된 인간을 적극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현실 도피는 아니었다. 내년 10월 문예진흥원 기획전에선 이 같은 몸짓을 볼 수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전원생활의 멋은 거창하지 않다. 이웃과 품앗이를 하며 막걸리 한잔 할 수 있는 “사람 사는 맛’이 좋다. 저녁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자리를 화폭에 따올 수도 있다. 인근 마을 명달리를 그린 그림 속에선 “값 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읊었다. 그도 그림이 안 될 땐 속이 상하다. 이럴 땐 산에 오르거나 양평 읍내로 나간다. 이 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후배 작가 임인호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막걸리를 마신다. 2차는 노래방이다. 이것도 모자라 어깨동무 뽕짝으로 거리의 소음이 되기도 한다. 뭐라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함께 즐거워해주는 이들뿐이다. 대학 동기인 아내 고영실도 요즘 작업실에 내려와 그림을 그린다.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 뒷바라지로 한동안 작가의 길을 접어야만 했다. “집사람이 공백기를 극복하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것 같아 무엇보다 기쁨니다.” 아내의 작품을 자랑이라도 하듯 꺼내보인다. 소나무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작업실을 나서자 진돗개 한 마리가 달려든다. 이웃에 사는 견공이다. 주인인 양 꼬리를 치며 안기는 모습이 정겹다. 그가 그만큼 편안하다는 얘기다. 그의 마음속 산수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편완식기자/wansik@segye.com
<연 보> ▲194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72년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2000년 금강산 기행전(일민미술관) ▲2002년 독도그리기전(서울대 박물관) ▲2003년 진경―그 새로운 제안전(국립현대미술관) |
2003.12.22 (월) 1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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