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수락산 끝자락에 사는 시인 천양희씨

바보처럼1 2007. 7. 10. 22:03
[전원속의 작가들]수락산 끝자락에 사는 시인 천양희씨
"나의 시는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누구나 가파른 절벽 하나쯤은 품고 산다. 그리고 날마다 그 벼랑끝을 기어오른다”며 “사는 일이 벼랑끝이지만 정상을 정복할 등산가들처럼 힘을 내자”고 궁지에 몰린 마음들을 다독이는 천양희 시인.
“무엇엔가 죽도록 시달리다가 놓쳐버린 마음은 가까스로 내게 매달렸습니다. 비뚤비뚤한 나는 매일 나 자신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25년 동안 내 화두는 보이지 않는 마음,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나를 끌고갈 때 내 침묵에 파문이 일어나고 말에도 결이 생겼습니다. 그 파문이, 그 무늬가, 물결처럼 바람결처럼, 숨결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스몄으면 합니다. 나의 시는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며 영혼의 자서전입니다.”

‘고독’ ‘고통’ ‘외로움’, 그리고 ‘사랑’의 시인 천양희(千良姬·61)씨. ‘시인은 자연의 서기(書記)’라고 단정하는 천 시인은 날마다 산을 찾는다. 시인은 산에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료받는다. 잠시 몸을 내려놓은 경기 의정부와 서울시가 만나는 수락산 끝자락에 시인은 길을 냈다. 아침 운동 코스이자 저녁 산책 코스이다. 시간을 정해 놓치는 않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산에는 30∼40년생 소나무들이 빼곡하다. 곧고 우람하진 않지만 구부정한 게 마치 우리네 옛 어머니 허리춤 같아 정겹다. 하루 2시간여 산행코스에서 시인은 인생을 배우고 시를 구상한다.

천 시인은 주말엔 멀리 서울을 가로질러 서초구 청계산으로 원정 산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립듯이 청계산은 시인에겐 떠나버린 님이자, 다시 만나야 할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잡목이 우거진 아기자기한 등산로에서 시인은 시적 영감과 위안을 얻는다.

“산은 높아질수록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인간들이 사는 동네는 작아지잖아요. 나 자신의 왜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은 평평하게 흐르지만, 산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있어 마치 삶의 도전과 같습니다. 잡목들을 잘 보세요. 작은 나무들끼리 서로 다정하게 사는 게 부럽지 않나요. 하잘 것 없는 잡목들도 저렇게 서로 어울려 사는데 왜 나는 혼자인지…. 참, 나무는 상처를 주지 않잖아요.”

무언가 말할 듯 말 듯하는 시인한테 왠지 모를 아픔과 그리움이 켜켜이 묻어난다. 시인은 어느 날 풀을 베다가 마음까지 베이고 만 상처가 있다. “저 바위가 슬프다고 울기나 합니까, 기쁘다고 웃기나 하겠습니까/ 나는 키 큰 소나무 밑에 엎드려 한참을 일어서지 않았습니다”(‘침묵’). 시인은 고통 속에서 각성을 얻는다. 시인이 1과 11, 111을 좋아하는 건, 그것들이 소나무를 닮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바위와 소나무와 풀은 스승이자 벗이다.

“풀잎에 귀를 대본다/ 지난 밤/ 벌레의 울음소리 남아 있다/ 오늘은 사람의 말로/ 그 소리 다 적을 듯하다/ 무엇인가/ 가슴께를 찌르는 그것/ 詩인가/ 다시 보니 바람 받아내는/ 몇 포기 풀들/ 내가 쓴 시보다 힘이 세구나/ 작은 잎 속에도/ 풀들의 한 생이 있었구나”(‘풀잎 시편’).

시인은 세상의 온갖 힘든 것을 다 짊어지고 다닌다. 달팽이가 자신보다 큰 집을 이고 다니듯, 온갖 시름을 다 안고 산다. 시인은 산에서도 고통을 느낀다. 시인은 아무렇게나 우짖는 산새 소리, 나무 부딪치는 소리는 물론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개울물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여고 1학년 소풍 때였어요. 신을 벗고 개울을 건너는데, 강물이 내 발에서 꺾여 흘러가는 걸 보고 얼마나 슬프던지 눈물을 펑펑 쏟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이미 나의 삶은 시인으로 굳어진 것 같아요.”

천 시인은 태백산맥 끝자락인 부산시 사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농장 둑에 오르면, 낙동강이 발 아래로 흘렀다. 절과 폭포와 원추리꽃 등이 어우러진 고향 마을의 풍광은 지금도 시심의 원천이다. 중·고교 6년을 기차로 통학하면서 보았던 낙동강 돛단배와 석양 놀은 초등학교 백일장 때 이미 두각을 나타낸 문학소녀의 마음을 가만두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너는 시인이 될 거야’라는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이렇게 규정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서울로 대학 진학하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산과 강이 있던 고향마을이 늘 그립습니다. 아마 지금도 산과 강을 찾는 심연엔 고향을 찾는 마음이 발로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강은 시인에게 말한다. 물은 절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낮게 흐르다 큰 바다에 닿는다고, 깊은 강물일수록 소리없이 흐른다고, 물은 또 경계가 없으니 물같이 살라고 강은 끊임없이 시인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물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중략)/ 오늘도 나는 물속에서 자맥질하지요/ 물같이 흐르고 싶어, 흘러가고 싶어”(‘물에게 길을 묻다’).

시인이 꿈꾸는 것은 자연과의 화해를 통한 희망과 생성이다. 시인은 말들이 뛰노는 들판인 줄 알고 이사한 마들역에 말들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마들은 없다’고 외치기도 했다. 그동안 거쳐온 전북 직소포, 강원 동해·한계령, 북한산 우이령, 부산 청사포, 포천 소리봉 등이 모두 시인의 품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건너갔지요/ (중략)/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지금의 인생은 ‘덤’이라는 천 시인은 전원 속의 삶이 세상과 떨어져 교통은 좀 불편하지만 마음만은 천국이라며 ‘시는 숨을 쉬는 것’이라고 정의한 네루다를 떠올린다.

글 조정진, 사진 황정아기자/jjj@segye.com

◆약력=▲1942년 부산 출생 ▲1966년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박두진 추천)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83년) ‘사람 그리운 도시’(88년) ‘하루치의 희망’(92년) ‘마음의 수수밭’(94년) ‘오래된 골목’(98년) 등 ▲제10회 소월시문학상(96년), 제43회 현대문학상(98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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