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북한강가 한쪽에 목조주택 짓고 정착 시인 최하림씨 | ||
"시인은 늘 세상 안팎 경계에 서있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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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저잣거리에서 살 수도 없고 산속에서 마냥 기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현실 바깥의 사람이기도 하지요. 길을 가다가 부모와 고향 생각에 울고, 저쪽 길로 가고 싶어서 울고, 이쪽 길을 가지 않은 게 후회스러워 우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국 길을 가고 있고, 늘 길 위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지요.”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나온 이래 만 40년째 그 길을 걸어온 최하림 시인. 그는 지금 물가에 지어놓은 집의 거실 바닥에 앉아 넓은 창 너머를 바라보며 문학이라는 애물단지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시인의 집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가 안쪽 동네에 서 있다. 강가의 풍경이 아름다워 일찍이 도시의 아베크족을 위한 카페들이 우수수 들어선 탓에 일명 문호리 카페촌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는 최하림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과 화가들도 많이 산다.
최하림이 이곳에 조립식 목조주택을 지어 정착한 것은 3년 전이다. 그 전에는 충북 영동군 호탄면, 삼도 접경지대의 깊은 산골에서 살았다. 도심의 직장에서 은퇴한 후 조용히 노후를 보낼 곳을 물색하던 중에 차를 타고 가다가 보슬비 내리는 다리 너머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그곳이 바로 호탄면이었다. 정작 비가 개고 난 뒤에는 처음에 보았던 것처럼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곳이었지만, 어쨌든 시인은 그곳에 둥지를 틀어 스스로 외로움을 맞아들였다.
“영동에서는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농사일이나 동네 사람들의 내력을 잘 모르니 더불어 말을 나눌 사람도 없고, 충청도의 자연도 처음이어서 낯설었지요. 덕분에 많은 생각을 했고 도시에서 함부로 굴렸던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양수리의 자연은 완벽하게 아름다워요. 이곳에서는 자연만 보고 살아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빈 틈이 없어 시가 나오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곳입니다.”
이곳에 살면 저곳이 떠오르고, 저곳에 있으면 이곳이 그립고, 늘 길 위에서 방황하다가 생을 마치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말에 이르러 최하림은 중국의 시인 한산(寒山)을 떠올렸다. 스님인 한산은 한 절에 머무르지 않고 늘 길을 떠나 슬픔에 젖어 살았는데, 춥고 배고파서 정 외로움을 견디지 못할 때는 절에서 불목하니로 사는 친구 습득을 찾아가 아궁이 곁에서 음식을 먹으며 서로 좋아했다고 소개한다.
“이제 자연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이 들면서 보니 자연이 살아 있어요. 아침 햇빛이 나무를 타고 내려오면 그늘이 생기고 바람이 흘러내리고 새가 오고 가는 미세한 변화가 끊임없이 감지됩니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지면서 자연의 배후가 보이기 시작하지요. 시간의 배후에는 과거가 있고 고향이 있고 어머니가 있듯이 모든 것에 배후가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느낍니다.”
40년 동안 걸어온 시인의 길에 대한 소회를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시를 위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이 들여다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시보다는 가족과 아이들이 더 좋고 벗들이 더 그리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시를 붙들었다기보다는 시가 그를 붙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그가 걸어온 길은 달리 생각하면 시를 그만두어야겠다고 고민했던, 시와의 싸움 길이었다는 것이다. 시를 절대적인 그 무엇인 양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사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삶의 깊숙한 현장에서 더 열심히 살았을 때 좋은 시가 찾아올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일 것이다.
“시인을 위로하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억지로 보여주는 시, 개념지워진 시, 쓰는 자신조차 위로하지 못하는 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절대니 순수니 참여니 하는 수식을 시 앞에 붙이면서 시를 구분했는데 광주항쟁을 겪고 난 뒤부터 진짜 시란 어떤 것인지 절감했지요. 그 참혹한 사태 뒤에 캄캄한 절망 속에서 시가 ‘붉은 꽃’처럼 나를 위로하더군요. 누군가를 절망 속에서 달래줄 수 있는 빨간 울음 같은 시야말로 참 좋은 시일 겁니다.”
시인에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시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이 쓴 시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시집이 꽂혀 있는 이층의 서재로 안내했다. 그는 자신의 시 제목도 잘 모른다고 아들의 놀림을 받기도 했다. 시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의 단계를 지나 시와 더불어 노니는 단계에 이르면 저리 무심해질 수 있을까. 목조 계단을 밟고 올라선 공간에는 양쪽 벽에 난 툭 트인 넓은 창들이 바깥의 자연을 그대로 서재 안에 심어놓고 있었다.
시인이 문호리에 지은 조립식 목조주택은 집을 지을 땅 75평만 사서 마련한 곳이다. 아는 이에게 전권을 주어 창문만 모두 17개나 있는 프랑스식 개념의 주택으로 지었다. 담도 없고 마당도 없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옆집 마당이고, 집 앞에 꽃을 심으면 길가에 심는 셈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살 수 없는 형태의 집이다. 비가 오면 목조주택의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빗물이 홈통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들이 음악처럼 들린다.
최하림은 텔레비전도 신문도 보지 않는다. 격동의 시절을 지나오면서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똘똘이’와 함께 산책을 다녀온 후 꼭 읽지 않으면 안 될 책을 보는 것 외에는 독서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은 잘 간다. 저녁 무렵에 시를 궁리하지만 정작 시와 만나는 때는 늘 햇빛이 환한 오전 무렵이다. 어린 시절 마당에 쏟아지던 햇빛의 인상이 오래 살아남아 그는 빛 속에서 시를 쓴다. 흐릿한 황사 안개가 흘러다니는 강가로 나와 뒤돌아보았을 때 산벚들이 하얀 꽃을 매달고 시인의 집 주변을 등불처럼 밝히고 있었다. 시인이 서가에서 빼낸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속에 축축이 젖어 있던 시 한편.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寒山 같은 시인도/ 길 위에서 비 오면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지난 시간들이 축축이/ 젖은 채로 길바닥에 깔려 있다”(‘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전문)
양평= 글 조용호, 사진 김창규기자
/jhoy@segye.com
<연보>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1963∼65년 김현 김승옥 김치수 염무웅 등과 ‘산문시대’ 동인 활동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 당선 ▲1988∼98년 전남일보 논설위원 ▲조연현문학상(1991) 이산문학상(1999) 현대불교문학상(2000) 등 수상.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ㅋ 시론집 ‘시와 부정의 정신’,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미술 에세이 ‘한국인의 멋’ 등.
2004.04.26 (월) 1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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