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속의 작가들

양평 왕창리에 사는 작가 안종연씨

바보처럼1 2007. 7. 10. 22:43
[전원속의 작가들]양평 왕창리에 사는 작가 안종연씨
"빛을 통해 우주를 만납니다”
 '모든 형태는 궁극적으로 빛으로 빨려들고 내뿜어지는 순간의 모습'이라는 안종연씨가 애견 자두와 산책을 하고 있다.
해질녘 밀양의 유천강가. 작가는 어린 시절 외로워 목놓아 울었던 그 고향 강가를 오늘밤 떠올려 본다. 기적 소리마저 서러웠던 기차를 타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엄마아빠에게로 갈 수 있으련만. 소녀는 강가의 돌에 앉아 그리운 이들이 있는 하늘쪽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별들이 어둠속으로 빛을 내리며 속삭였다. 바보처럼 울지 말고 나랑 함께 놀지 않겠니.

빛과 함께 노는 작가 안종연(52)이 4년 전 미국에서 돌아와 경기도 양평 왕창리에 작업실을 마련한 이유도 강이 가까이 있는 것이 좋아서다. 유달리 어려서 몸이 허약해 대처로 나간 부모형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고향에 남아 요양해야 했던 그에겐 강가는 아픈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때처럼 이 밤도 작업실 주변 모 낸 논에선 개구리 소리가 구성지다. 외로움이 언제나 무서웠던 작가는 외국 생활의 고독함도 고향 강변을 그리며 삭였다.

파란 잔디가 깔린 앞마당을 가진 쌍둥이 건물 한쪽엔 자두라는 이름의 진돗개가 한가로이 졸고 있다. 한쪽은 작업실로, 또 한쪽은 작가의 작품으로 실내를 꾸민 생활공간이다. 스테인리스와 알루미늄 판이 작업대 위에 놓인 작업실은 영락없는 작은 공장이다.

드릴을 든 작가가 철판 위를 분주히 오가며 칼질하듯 어깨춤을 춘다. 철판을 캔버스 삼아, 드릴을 붓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웽웽거리는 소리가 지나간 자리엔 산수가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빗살 선과 철판 몸체에서 발산하는 빛이 한데 어우러져 연출하는 분위기가 특이하다. 작가는 낭만적이라 했다. 스테인리스 판은 구운 온도에 따라 여러 가지 맛의 색깔을 내 배경과 여백의 맛을 더해주고 있다.

작가는 거울과 구슬 작업으로 이어진 빛 만들기를 철판작업에서도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다. 드릴로 무수히 철판에 흔적을 만드는 일은 작가에겐 빛을 향한 끝없는 구도의 길인 셈이다. “드릴 작업은 공간을 분할해 가는 과정이지만, 결국엔 빛을 분할하는 행위지요.” 공간과 빛의 무한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작가에겐 처연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작가는 무심하게 도를 닦는 일에 비유했다.

언젠가 파리 퐁피두센터 앞 브랑쿠지 작업실(기념관)에 들렀을 때 하오의 빛이 쏟아지는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는 그는 마치 공구들을 조명 받는 무대 위의 연극배우처럼 그린 ‘공방 시리즈’를 내 놓는다. 이후 ‘공방의 공구’ 같은 배역에 몰입했던 작가는 나른하고 로맨틱한 파리 무대가 싫어졌다. 다이내믹한 공구질이 하고 싶어 미국으로 공간을 옮긴다. “뉴욕에서 공공미술 공부는 오히려 제 뿌리를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소박하지만 빛이 있어 화려한 철판작업은 동양정신을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하든지 제 소리가 울림이 되어 남에게 감동을 주면 좋겠어요. 생활 그 자체가 예술이길 바라지요.” 빛이 생명의 근원이기에 빛이 만든 색이 마냥 좋다는 작가는 양평 강변에 서서 오늘도 물빛을 바라본다. 새벽 물안개 속에 흐릿한 실루엣만 드러내는 강 너머 산들, 해와 달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물결, 저녁노을에 물든 물빛 모두가 고향 강가를 닮았다. “작가에게 사는 거처란 그림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것 같아요.”

피곤하거나 외로울 땐 지금도 고향 강가를 생각한다는 작가는 강물 위로 햇살이 찬란하게 떨어지는 그 순간, 그런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해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철판 위에 금속성 안료를 상감 처리해 채색 산수화를 그리던 작가는 최근 들어 산마저 버리고 물빛에만 매달리고 있다. 빛을 순수한 물빛으로만 그려내겠다는 의지다. 눈부신 빛살로 가득 찬 화면은 모든 것이 정지되는 무념 상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바로 작가의 물빛이다.

“하나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느낀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사랑하는 작가의 생활공간엔 유리구술 조명과 낯엔 거울, 밤엔 벽등으로 이용되는 작품들이 인테리어를 이루고 있다. “예술작품이 거룩할 필요가 있나요. 쓰임에 진정한 가치가 있지요.” 유리를 캐스팅해 만든 구슬에서 비추는 빛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과 우주의 모습이다. 이웃에 사는 소설가 김민숙씨는 ‘별들이 제 몸을 태우는 빛으로 말을 걸어온다’고 말할 정도. 작가가 빛을 만들고 빛을 드릴로 그려내는 작업은 또다른 빛과 공간을 재현하는 행위인 셈이다. 결국 빛이고 우주 얘기다. “어린 시절 강둑에 앉아 바라본 우주이자 상상했던 것들을 해보는 것입니다.”

작가는 왜 종이에서 캔버스, 나무, 유리, 알루미늄, 스테인리스로 점점 강한 재질에 집착하고 있을까. “영원한 빛을 좀더 변하지 않는 재질에 담는 것이 궁합이 맞는 것 같아요. 재질이 강할수록 맑게 비추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유리와 철을 다루려고 공방에서 견습공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작업은 자연스럽게 바깥 설치작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에게 편안하게 캔버스작업으로 돌아오라 한다. 하지만 그는 “철이 종이처럼 말랑말랑 느껴질 때까지 해볼 작정”이란다.

날카로운 드릴 소리가 이젠 우주의 블랙홀로 초대하는 ‘운명 교향곡’ 같다는 작가. 귀마개도 없이 작업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빛에 빠져든 우주의 작은 별을 본다.

글 편완식, 사진 허정호기자/wansik@segye.com

<연 보>

▲1952년 밀양 출생 ▲1972년 부산 동아대 회화과 3년 수료▲1992년 뉴욕 비주얼아트스쿨 대학원 졸업 ▲국립암센터, 테크노마트21 등에 설치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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